신현규 | KD Books(케이디북스) | 2010.7.12-14
식민지 시대에 가수로서 명성을 누리고 그것도 기생 출신임에도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들을 낳고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다가 북한의 인민예술인으로 추앙받았던 여가수에 관한 내용이다. 이 시대의 대중 예술인 상당수가 짧은 영광을 뒤로 요절하거나 비참한 말년을 보냈던 것과 비교해서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효석의 임종을 지켰다던 그 기생이 바로 왕수복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해주는 책이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나 내용 설명을 봤을 때 식민지 시대와 그 시대의 대중 예술 그리고 왕수복이라는 여가수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깊은 사실을 만날 거라고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기대를 가진 사람에게는 좀 실망스럽다. 전반부는 왕수복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중후반부는 당시 잡지에 소개됐던 왕수복의 모교인 평양기생학교나 왕수복의 인터뷰 전문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나머지 분량은 왕수복의 삶에 대한 설명인데 책 자체도 작고 얇은데다 내용은 좀 빈약한 편이다.
지식적인 측면으로는 실망스러웠지만 요즘 가십 기사를 보는 것 같은 그런 관음증적인 즐거움은 준다. 문학사에서는 이효석의 임종을 지킨 기생으로만 소개되던 여인이 바로 당대 최고의 가수였다는 사실은 내게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왜 이 이름을 그동안 알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다 보니까 월북 예술인. 평양이 고향인 그녀는 북한에 남게 되고 인민 예술인으로 대접 받으면서 제2의 전성기까지 구가한다. 이런 상황이면 9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감히 이름을 내뱉는 것조차도 금기시되었을 것이다. 꽤 많은 그녀의 음반이 혹시라도 빨갱이로 몰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쥐도 새도 모르게 쪼개져서 불쏘시개로 쓰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또 왕수복이 결혼한 그 김광진이 노천명 시인의 연인이었고 월북했다던 대학교수라는 사실은 단편적으로 끊어져있던 꼬리랄까, 당대의 연애족보가 완성되는 느낌? 고고한 시인보다는 가수가 더 매력적이었던 모양이다. ^^; 만약 김광진이 왕수복 대신 노천명과 결혼했다면 우리는 사슴이라는 시를 90년대가 되어서야 알 수 있었겠지? 라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랬다면 김완선의 그 치욕의 기린 사건은 없었을 텐데. ㅋㅋ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기 망정이지. ㅍㅎㅎㅎㅎㅎㅎㅎ;;;;)
인기 절정에서 공부를 택하고 또 컴백하려는 시점에 일본어로 민요를 부를 수 없다는 이유로 은퇴를 택한 것.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 그 덕분에 최승희나 다른 많은 예술가들이 덮어썼던 친일파의 굴레에서 자유로웠고 남편과 함께 숙청이 잦은 북한에서 대접받고 살다가 애국열사릉에까지 안치될 수 있었겠지. 인생은 눈앞의 이익을 보지 말고 길게 봐야 한다는 교훈을 이쯤에서 얻게 됨.
잡지의 심층 취재 류의 특집 기사 정도를 기대하면 큰 불만이 없을 듯. 이 저자의 다른 책 '꽃을 잡고'를 사려고 했는데 좀 망설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