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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춤

국립발레단 롤랑 프티 트리플 빌 (2010.7.17. 7:30)

by choco 2010. 7. 21.
공연 보고 온 날 썼어야 하는데 마감도 겹치고 이런저런 일에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벌써 수요일이다.  지금 쓰지 않으면 아마도 다른 많은 공연들처럼 감상을 간단하게라도 끄적여놓지 않을 게 뻔해서 1시 전에는 반드시 잔다는 규칙을 깨고 앉았다.

난 유럽 안무가들을 좋아한다.  1위부터 하나씩 줄을 세우라면 그건 불가능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그룹식으로 묶어서 꼽는다면 가장 수위에 올라가는 인물이 바로 롤랑 프티.  드라마틱하면서도 유치하지 않고, 음악과 미술의 조화가 그야말로 예술인, 아주아주 세련된 안무가. 그래서 국립 발레단이 롤랑 프티의 대표작 중 3개를 무대에 올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엄청 기대를 하고 조기예매 기간에 빛의 속도로 예매를 마쳤다.

그리고 7월 17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예술의 전당으로 고~고~


두번 째 작품은 젊은이와 죽음. 

영화 백야에서 바리시니코프가 워낙 강렬한 모습을 보여줘서 많은 사람들에게 눈에 익은 작품이다.  국립 발레단을 떠났던 이원철씨가 게스트 무용수로 오랜만에 등장. 상대역은 윤혜진씨.  이원철씨가 발레를 하게 된 계기가 백야에서 바리시니코프를 보고서라고 하던데 그에게 굉장히 의미가 깊은 작품일 것 같다. 

장 콕토의 대본을 발레로 옮긴 작품인데... 어떻게 보면 라 벨 에포크 시대에 속하는 그 장 콕토의 시가 21세기에도 이렇게 강렬하게 다가오는 걸 보면 역시 천재라는 족속들은 따로 존재하는 것 같다.  대중적이고 인기가 많기는 하지만 솔직히 내가 선호하는 롤랑 프티 작품 리스트 중에서는 아랫쪽에 있는 작품이라 그냥저냥~ 

윤혜진씨에게는 죽음 역할이 잘 어울리는 옷이었던 것 같지만 이원철씨의 작은 키와 그녀의 큰키가 좀 부조화스러워서.  ^^;  난 차라리 이원철씨가 카르멘에서 호세를 했더라면 더 잘 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마지막 작품은 카르멘.  카르멘은 김지영, 호세는 김현웅. 바리시니코프와 지지 장메르의 전설적인 공연 영상물로 눈이 한껏 높아져 있는 터라 조금 걱정을 했는데 기우였다. 

지지 장메르와 바리시니코프의 카르멘을 볼 때는 순진한 호세를 연상의 농염한 여인인 노련한 카르멘이 홀라당 잡아 먹는구나~ 이런 느낌이었는데 김현웅씨의 호세는 완전 카리스마 작렬의 그야말로 남자!  그동안 롤랑 프티 뿐 아니라 다른 안무가들, 오페라까지 수많은 버전의 카르멘을 보면서 늘 어러비리 순진무구한 호세보다 박력있고 남성적인 에스까밀리오를 선택하는 카르멘을 지지했는데 내 평생 처음으로 '얘야, 그 투우사보다 호세가 훨~ 낫구나.' 라는 안타까움이 작렬.  롤랑 프티의 안무 자체가 호세는 남성적으로, 투우사는 좀 코믹하게 처리하는 면이 있는 것도 이유겠지만 김현웅의 호세는 정말 멋졌다.  김지영씨가 복귀한 지는 쫌 됐지만 그녀의 복귀 무대는 오늘 처음 보는 건데 유럽에서 생활이 그녀에게 나쁘지는 않았던듯.  테크닉이야 말 하면 입 아픈 무용수이지만 이전엔 드라마적인 섬세함이 부족했는데 그게 메워진 것 같다.

엄청 피곤하고 또 비까지 오는 주말 저녁에 아주 만족스럽고 행복한 공연이었다.

지젤이나 안나 카레리나 같은 발레를 보면 남자 때문에 여자가 신세 완전히 망친다고 분개했는데 하지만 카르멘이나 마농 레스꼬를 보면 반대 사례도 역시 만만치가 않다.  언제 시간 나면 남자 때문에 신세 망치는 발레 작품과 여자 때문에 신세 망치는 발레 작품을 한번 분류를 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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