ㅌ님댁에 놀러갔다가 빌려온 책 중 한권.
루시 모드 몽고메리 하면 곧바로 빨강머리 앤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가진 빨강머리 앤 전집에 그녀의 중편이나 단편들이 꽤 수록되어 있음에도 앤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야기들이다보니 다른 작품은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 그외에도 꽤 많은 장편을 쓴 모양이다.
정말 몽고메리 여사가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책을 팔어먹기 위한 출판사의 마케팅용 카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 스스로 '지금까지 쓴 작품 중 최고'라고 했다는 소설. 에밀리의 어린 시절 이야기인 이 에밀리 초원의 빛에선 '그렇지 않을까?' 정도 수준이지 대놓고 드러나지 않지만 2권 에밀리 영혼에 뜨는 별 3권 에밀리 여자의 행복으로 갈수록 누가 봐도 그녀의 얘기인 게 느껴질 정도로 자전적인 요소가 정말 강하다.
아무래도 첫인상이라는 게 제일 강렬하다보니 빨강머리 앤과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ㅌ님 말마따나 색채로 비교하자면 앤은 그야말로 홀홀단신 천애고아임에도 파스텔 톤의 밝고 가벼운 느낌이라면 비록 부모는 없어도 비교적 부유한 친척이 있는 에밀리의 형편이 훨씬 나음에도 좀 무채색에 가까운 어두움이 있다.
같은 작가가 비슷한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쓴 성장물임에도 비슷하거나 답습 내지 자기 복제의 느낌이 없는 건 확실히 칭찬해줄만 하다. 앤과 이거 말고 다른 장편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에밀리에게 작가는 상당히 자기 투사를 정직하게 많이 하고 있고, 그게 앤과 차별성을 확연히 만들어준것 같다.
사랑의 도피행을 한 커플 사이에서 태어난 에밀리는 앤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요셉의 일족이고, 커튼 뒤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간혹 만나는, 커튼이 살짝 들쳐진 그 순간에 만난 그 환상의 세계를 글로 옮기려는 열정을 갖고 있고, 그것은 현실적인 이모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꺼지지 않는다.
글을 쓰는 건 선택이 아니라 써야만 한다는, 숨을 쉬는 것처럼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욕구라는 에밀리. 고아가 된 그녀가 독신인 늙은 이모들과 외삼촌이 사는 집에서 소녀시절을 보내는 시간들이 1권 에밀리 초원의 빛의 내용이다.
어쩌면 흔한 소재에 평범할 수도 있는 고아 소녀의 시골마을에서의 일상인데 참 흡인력이 강하다. 이건 앤에서도 느꼈는데 몽고메리 여사의 엄청난 강점이고 장점인듯.
내용의 재미와 상관없이 글을 쓰거나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은 자기 성찰과 반성의 차원에서 꼭 한번은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정말 아름답고 멋진 글이라고 써놨던 작품 노트를 몇년 뒤에 다시 보면서 에밀리가 창피해하는 장면에, 어릴 때 끄적이고 자랑스럽게 돌려봤던 공책을 한참 뒤 다시 발견했을 때 그걸 남이 볼까 두려웠던 내 자신이 겹쳐졌다. 제발 그걸 봤던 친구들이 그 사실을 싹싹 다 잊어버렸기를. 그리고 그녀를 통해 세상에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시와 소설들에 대한 토로에선 역시 창피한 일기 중 한 구절이긴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이야기들이 세상에 내보내달라고 나를 못 살게 굴고 있다, 내 상상속 주인공들을 다 글로 써줘야 한다고 믿었던 정말 오래된 기억도 되살아났다.
그나저나 나를 가득 채웠던 그 이야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