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이 최소한 4-5번은 열리는 회의를 2시간 넘게 견디고 와서 마감은 도저히 무리라서 내일 마감은 내일 하기로 하고... 졸려서 자려고 보니 아직 시간이 너무 이르다. 그래서 간만에 로설 포스팅~
얼마 전 ㅅ님네 놀러가서 빌려온 로설 등등 한동안 소원했던 독서에 열을 좀 올렸다. 일일이 다 쓰기는 귀찮고 생각나는 것 몇개만.
1. 월플라워 시리즈 / 리사 클레이파스.
지금은 사라진 ??? 이북 사이트에서 번역해 출간했던 리사 클레이파스의 작품들. 그때 사야지~ 하다가 어영부영 절판이 되어버리고 사이트도 사라져서 엄청 황당했는데 ㅅ님네 가니까 4권이 사이좋게 꽂혀 있었다. 잽싸게 빌려왔음.
네권의 제목은 봄빛 스캔들, 여름 밤의 비밀, 가을날에 생긴 일, 겨울을 닮은 악마로 봄부터 차례로 이어질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여름-> 가을 -> 겨울 -> 봄으로 이어져서 처음에 내용을 잘 모를 때는 뭘 먼저 봐야할지 좀 헷갈렸다.
시리즈 제목을 보면 다들 짐작하다시피 사교계에서 인기가 전혀 없는 벽의 꽃 친구인 네 아가씨가 주인공으로 각각 신랑을 찾아서 잘 먹고 잘 사는 내용들인데 그다지 잘 된 번역이라고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리사 클레이파스 특유의 재치가 간간히 보이면서 톡톡 튀는, 전형적인 서양 역사 로맨스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확산되던 빅토리아 시대에 부상한 신흥 자본가 그룹과 몰락을 시작한 귀족 계급을 배경으로 적절히 활용하고 있어서 그런 부분들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
겨울의 아가씨 에비와 결혼한 세바스찬 세인트 클레어는 사실 가을의 주인공인 릴리안과 결혼했어도 둘이 잘 맞춰서 살았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이 아저씨가 제일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옛날에 썼던 소설의 주인공이 비록 대화에만 나오지만 등장하는 것도 한 작가를 꾸준히 판 독자에게는 남다른 즐거움~
여기 등장한 상당히 비중있는 단역인 집시 혼혈 로한 캠과 마지막 남은 월플라워 데이지가 맺어지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아무래도 작가가 마지막 시리즈를 쓰면서 본래 구상을 틀어버린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재미있는 번역 로맨스. 앞의 세권은 정말 빵빵한 재미, 마지막 권은 살짝 기운이 떨어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음~ 아... 재미있는 번역 로맨스 읽고 싶다.
2. 카르페 녹뎀 / 셰릴린 케년
그녀의 이 다크헌터 시리즈를 좋아해서 빼놓지 않고 읽어왔는데, 역시 어느날 갑자기 사이트가 문을 닫는 바람에 여기부터는 구입하지 못했다. 장르쪽은 구입해야할 책은 망설이면 안 된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랄까. 그래도 ㅅ님의 은혜로운 서재 덕분에 역시나 읽었음.
앞서 등장한 수많은 다크헌터들이 모조리 이를 득득 가는 로마 장군 발레리우스. 그리고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언젠가는 다크헌터와 눈이 맞을 거라고 짐작했던 태비터. 태비터의 쌍둥이 언니 아만다가 발레리우스와 원수인 그리스 장군 키리안과 결혼했기 때문에 거의 로미오와 줄리엣 수준이다.
귀족적인 발레리우스와 미국인 중에서도 상당히 급진적인 취향인 테비터의 만남은 불꽃이 확확 튀기도록 재미가 있었다. 적어도 중우반까지는. 모든 문제 해결자이나 천하무적인 아셰론도 위기를 맞는 등 그동안 읽었던 다크헌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게 갔는데 마지막 즈음은 정말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ㅜ.ㅜ
정말 얼마나 황당했는지. 정말 차마 여기 옮기지를 못하겠다. 그동안 심형래의 영화에 게거품을 물던 진중권씨를 비롯한 심형래 비판자들을 보면서 '그냥 평범한 B급 무비인데 뭘 저렇게 열을 내나' 했었는데 내가 카르페 녹템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느꼈던 그 기가 막힌 심정, 배신감 등등을 느꼈다면 그들에게 충분히 동조할 수 있음.
번역이 되지 않으면서 원서로도 이 시리즈를 간간이 보면서 이 작가가 지적 수준이 높다거나 문학적, 혹은 문화적 소양이 있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은 했다. 똑같은 로맨스 작가임에도 아만다 퀵이나 리사 클레이파스와 쓰는 표현이나 어휘가 확실히 수준이 낮았다. 읽는 외국인 입장에서는 이렇게 쉬운 문장과 평이한 비유가 술술 잘 나가서 편하긴 하지만...
빌려온 것 포함해서 번역본도 아직 안 읽은 게 남아 있는데 읽고픈 의욕이 다 사라졌다. 나머지 시리즈를 읽을 기운이 다시 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듯.
1. 천공의 연 / 조례진
동생이 재밌을 것 같다고 빌려와서 읽었는데 오~ 정말 재밌었다.
평범하다고 할 수도 있는 설정이지만 그래도 탄탄하게 재미의 요소들을 꽉꽉 채운, 책 두께만큼이나 빵빵한 내용을 가진 책. 그런데... 도대체 교정을 보긴 본 건지, 편집자는 원고를 그냥 필름에 얹는 것 말고 뭘 했는지에 대한 의문문을 갖게 하는 책. 읽는 내내 알아서 자체 교정을 하면서 읽어야 했다.
아마도 초고 때 이 주인공은 황제의 조카였던 모양이다. 수정을 하면서 동생으로 바꾼 것 같은데 초중반까지는 그래도 꼼꼼하게 동생으로 바뀌어 있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조카와 동생이 거의 반반, 후반에는 아마도 조카가 더 많았던듯. --; 이렇게 설정 바꿨을 때 호칭이나 이름 고치는 게 별 거 아니게 보여도 엄청 골치 아프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편집자와 교정자가 한번씩만 더 봐줬어도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을 듯. 나중에는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남주의 조카인 황태자의 나이와 황후와 남주가 만났을 때 나이에 관한 설정도 어느 부분은 고치고 어느 부분은 고쳐지지 않은 것 같다. 황태자가 11살로 나왔다가 8살로 나왔다가 하는데 어떤 부분은 11살이 맞고, 또 다른 설명을 보면 8살이어야 하는데?가 역시나 반복.
정말 괜찮을 수 있었던 작품이 작가, 편집자, 교정자의 게으름으로 문제투성이가 되어버린 안타까운 예. 만약 재판이 된다면 꼭 고쳐서 나오길. 그러면 소장하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 아무리 재미있어도 자체 교정하면서 읽는 건 원치 않아.
2. 공주 연생 / 김우주
별로 대단한 사건도 없고, 흔하디 흔한 정략결혼인데 순진한 여주와 사납고 무섭긴 하지만 순진한 구석이 남아 있는 남주의 아기자기한 결혼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조선 후기에도 청나라 왕에게 시집간 조선 공녀가 있었다던데 -그녀도 공주 책봉을 받았다고 함- 거기서 모티브를 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있을 법한 얘기로 다가와 더 괜찮았던 것 같다.
진짜 순진한 여주 때문에 많이 웃었음. ㅋㅋ
3. 국혼 / 이지환
간만에 나온 이지환님의 역사물이던가?
평은 극과 극으로 갈리던데 난 재미있는 쪽. 아마 무협에 어느 정도 내공이 있는 독자들, 그리고 전형적인 로맨스에 살짝 질린 독자들에겐 재미있었을 거고, 로맨스의 범위를 좁혀서 잡고 그 안에서 재미를 찾는 독자들에겐 이게 뭔 소리여??? 하는 그런 느낌이었을 듯.
나로선 좀 더 무협의 분위기가 살아도 좋았겠지만 그랬다가 아마 곡소리가 났을 테고... 이지환 작가 특유의 몰아치는 스토리 라인은 역사물에서 확실히 더 재밌다. 현대물에선 이상하게 겉돌지 내게는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음.
곳곳에 깔아둔 이야기의 구조가 탄탄하고 재밌긴 한데 남녀 캐릭터의 절절함이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는 것에는 나도 백분 공감. 그렇게 팍 꽂히기에는 아무리 과거라고 해도 둘 다 좀 심하게 많이 어렸지. 남주와 여주가 처음 만난 나이가 한 3-4살만 많았더라도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다.
솔직히 나도 얘들보단 얘네 부모들의 이야기인 봄날이 더 재밌음. 범이설 마지막 권 나오면 봄날이랑 같이 사야지~ㅇ
4. 불면증 / 김윤수
분명 환상문학인 로맨스를 제대로 쓰면서도 묘하게 특이하면서 현실감을 주기 때문에 좋아하는 작가.
얘도 어어!!! 하는 사이에 출판사가 문을 닫고 책도 사라져 버렸다. --; 다른 곳도 아니고 대원이 그렇게 갑자기 노블리타를 버릴 줄은 정말 몰랐음. 나처럼 느리지 않은 ㅅ님 덕분에 역시나 소원 성취를 할 수 있었다.
이번엔 로설 사상 최초로 진짜 사이코패스가 남주로 등장했다. 여주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남편울 갖다 버리지는 못할 망정 어떻게든 수습해서 살려고 하는, 아마 다른 작품에서 등장했다면 온갖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여자.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만남부터 행로는 짜증보다는 흥분을 준다. 장르의 특성상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로설을 보면서 두근거릴 수 있는 건 그 과정의 탄탄함과 정교함인데 불면증은 특이하지만 정말 재미있다.
남주가 범죄자나 범법자인 것은 안 된다는 미국 로맨스 소설 작가 협회의 기준에 따르면 이 소설은 로설로 인정받을 수 없지만 세상이 하도 험악해서 그런지 나쁜 놈은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를 해주는 것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됨. 드라마나 영화였다면 후폭풍 때문에라도 비극으로 장렬하게 끝났어야겠지만 로맨스라는 장르답게 그 나름대로 최선의 해피엔딩.
이렇게 문제 많은 남자랑 이뤄지려면 그 정도 희생은 필요했겠지.
본 게 더 많지만 일단 여기서 끝~ 더 쓰기 귀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