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내 입에서도 새누리당 공천이 차라리 더 낫다란 소리가 나오게 했으니 말 다 했지.) 민주당의 헛발질로 안철수 교수가 야권의 유일한 대안을 넘어 이제는 메시아 소리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왜 나올 듯 나올 듯 안 나오느냐 뒷말도 많고 너무 쟤는 데 아니냐 소리도 나오던데, 어제 ㅅ님과 통화하다가 얘기한, 문득 떠오른 옛 기억이 하나 있어서 끄적끄적.
예전에 내가 했던 프로그램에서 안철수 교수가 안철수 바이러스 연구소 CEO이던 시절에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를 만든 적이 있다. 우리 팀에서 만든 건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움- 촬영 소스니 만남의 뒷 얘기는 서로 다 공유하기 때문에 방송되지 않은 에피소드들은 꽤 많이 알고 있다.
이 내용이 방송이 됐는지 안 됐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안철수라는 인물의 본질이랄까 성격을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에피소드는 이거지 싶어서 기억나는대로 옮겨본다.
그가 학생 때 바둑에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고 한다. 보통 바둑이 두고 싶어지면 99.9%의 사람은 집이나 주변에 있는 바둑판을 꺼내 바둑알을 얹어보면서 놀거나, 좀 둔다는 사람에게 가르쳐달라고 하거나, 좀 있는 집 자식은 바둑학원에 보내 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바둑에 흥미가 생기고 두고 싶어지자 주변에 있는 바둑책이란 책은 다 독파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바둑돌을 처음 잡았을 때 실력은 이미 ?급 수준이었다고 함.
내가 보기에 안철수라는 사람은 흥미를 갖게 된 분야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완벽하게 준비와 조사를 하고 이걸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기면 첫 돌을 내려놓는 사람이다. 일단 맨땅에 헤딩해 구르면서 배워보겠다는 건 그의 사전에는 없는 방식. 안철수 교수의 방법이 100% 옳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살아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다.
정치판에 들어올 생각은 있으나 아직 제대로 잘 할 수 있을지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 그러나 공부는 분명히 하고 있을 거다. 그동안은 원서 접수의 데드라인이 나름 있었는데 이제는 접수 마감이 가까워오니 자신의 공부 상태를 점검하고 있겠지. 그가 들어오면 -결과는 모르겠으나- 그 스스로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는 거고 안 들어오면 가장 큰 이유는 그 '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일 거다.
난 그렇게 생각함.
많이 새는 얘기인데... 출연자가 아주 능숙한 선수이고 짧은 2-3분 내지 10분 정도의 방송에선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정체성을 속이는 거 가능하다. 하지만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50분짜리를 만들려면 밀착 취재가 필수이고 인터뷰는 정말 진을 빼놓는다. 징그럽게 붙어 쫓아다니는 카메라를 앞에 놓고 한 며칠 수백가지 질문을 반복해서 받다 보면 아무리 자기 컨트롤이 강하고 두꺼운 가면을 쓴 사람도 순간순간 본질을 드러낸다. 말실수도 하고.
띄워주는 내용인 만큼 물론 방송에는 이런 걸 내보내지 않지만 찍어온 걸 쳐다보고 있으면 '쟤가 거짓말 하는구나.' '정말 확신하는구나. 진실이구나.' 가 카메라에 확실히 드러난다. 정말 능란하게 카메라와 제작진을 컨트롤하면서 끝까지 자신을 완벽하게 드러내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 고건 전 총리.
이제는 떠나간 기차지만 난 정말 그가 대통령이 됐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었다. 뒤통수를 치더라도 내가 뒤통수 맞는 것도 모르게 때릴 세련된 악마랄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아마 제대로 된 보수 정부의 모습을 보여줬겠지.
안철수의 경우는 우리 팀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어서 인터뷰 소스들도 다 챙겨봤었는데 그가 정치를 한다면 확신범일 거다. 누군가 쓴, '안철수는 또다른 이명박'이라는 헤드라인을 본 기억이 나는데 (그 기사는 보지 않아 내용은 모름)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는 그 확신에 있어서는 분명히 동일한 수준이지 싶다.
그렇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거의 유사점을 찾을 수 없다는 건 -만약 안교수가 정치에 입문한다면- 국민에게는 그나마 다행이고 안철수 교수에게는 불행일 거다. 예전에도 이런 내용을 쓴 것 같은데, 안교수는 자신의 이득을 좇아서 그를 추종하는 정치 선수들을 챙겨줄 스타일은 아니다. 당연하다고 기대하던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을 때 돌아서는 하이에나떼에게 그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들의 고삐를 틀어쥐고 움직이려면 적절히 쥐약을 뿌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안철수라는, 그나마 이정표가 될만한 인물이 그것까지 '잘'하게 되는 건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이빨에 물어뜯기는 또 한명의 순교자를 보고 싶지도 않다.
내가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정말 괜찮다.'고 감탄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저대로 변하지 않고 끝까지 갔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던 사람. 그래서 난 그가 정치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