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예매할 때는 언제 7월이 오나 했는데 이젠 벌써란 소리가 나오는 7월. 행복한 공연이었음.
기대가 크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줄리 켄트 여사의 지젤은 100% 만족. 정말 괜히 지젤 스페셜리스트란 소리를 듣는 게 아닌 거다.
주디스 맥크럴이란 영국의 유명한 무용 평론가인 까칠한 아주머니 (지금은 할머니겠지)가 지젤 2막의 첫 아라베스끄를 묘사할 때 공기가 치맛자락을 들어올리는 것처럼 음악에 맞춰서 천천히 떠오르듯 이란 류의 표현을 썼는데 오늘 줄리 켄트의 지젤이 바로 그랬다. 토 소리도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힘의 완급 조절도 완벽했고.
이제 40대 중반인 그녀의 나이를 감안해서 농익은 연기력과 표현력은 기대했어도 테크닉적인 면은 기대치를 확 낮추고 갔는데 이게 웬걸. 여전히 펄펄 날아다닌다. 1막에서는 정말 순진하고 청순한 지젤로 2막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픈 윌리를 제대로 보여주는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 기억 속 최고의 지젤은 문훈숙 단장 현역 시절 거의 마지막 시기에 드라고스 미할차와 파트너로 나와 춤췄던 지젤인데 그 지젤에 육박하는 지젤은 줄리 켄트의 공연이 가장 가까운 것 같다.
마르첼로 고메즈는 기름통에 퐁당 담궜다 꺼낸 느끼한 알브레히트를 제대로 보여줬는데... 파트너를 돋보이게 하는 능력이 있는 무용수인 것 같다.
오늘 공연에서 줄리 켄트를 제외하고 가장 눈을 즐겁게 해줬던 건 패전트 파드데의 다닐 심킨.
패전트 파드데는 오래 전 이원철씨의 데뷔 공연 때 띠용~띠용 했던 걸 제외하고 어느 발레단 공연을 봐도 그냥 시큰등 심드렁 했는데 오늘은 바리에이션에서 완전히 날아다니는 무용수를 보면서 "앙헬 코레야가 떠오르네. 오오오!!!" 하고 감탄사 연발. 공중에서 머무는 체공 시간은 1.5배, 보여주는 동작은 다른 사람의 두배. 완전 대박이다! 이렇게 외치고 나중에 오늘 캐스팅을 보니까 다닐 심킨이었음. 친구와 역시 다닐 심킨. 이러고 고개를 끄덕끄덕.
키가 딱 5센티만 더 컸더라면 최소한 앙헬 코레야 급이고 정말 세계 정복도 가능한 총각인데... 아니면 하다 못해 알렉산드라 페리가 현역이던 세대에 태어났거나. 여러모로 참 아쉽다. 여하튼 눈은 정말 호강했다.
이 친구의 파랑새 파드데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왔음.
힐라리온을 춤춘 사벨리에프도 역시나 멋졌다.
볼 때마다 정말 힐라리온을 보면 조연의 비애를 느낌.
사실은 잠깐 데리고 놀려고 했던 알브레히트와 달리 오랫동안 제대로 지젤을 좋아했고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찾아왔는데 결국 윌리들에게 죽는 건 힐라리온. 알브레히트는 지젤 덕분에 살아서 돌아가고.
억울하면 주인공이 되어야되겠지만 정말 발레 전체를 통털어 가장 억울한 캐릭터이지 싶다.
미르타는 오늘만 유일하게 질리안 머피가 나왔는데... 그닥 그녀에게 어울리는 역할은 아닌 듯.
첫 등장과 솔로에서 뭔가 요요한 요기와 카리스마가 풀풀 넘쳐야 하는데 춤은 잘 추지만 그런 아우라가 없었음.
이상하게 미국쪽 발레단 공연에서 미르타가 눈에 쏙 들어왔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기대치를 팍 낮추고 간 덕분에 1막에선 군무 때문에 뒷목 잡을 일은 없었고 2막도 초중반 중요한 부분은 그럭저럭 삑사리 안 내고 잘 하더니 역시나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파드데가 끝나는 막판에 줄 못 맞추고 각도 따로 노는 게 위층이다 보니 눈에 확확 들어와서 좀 깼음.
마린스키나 파리 오페라 발레의 Ctrl V 수준의 군무는 아예 바라지도 않지만... 에효호... 그래도 2008년 돈키호테 때 한 대씩 쥐어박고 싶었던 그 군무에 비하면 양반이니 투덜거리지 말자.
프라임 오케스트라는 그 쉬운 아돌프 아당의 곡임에도 삑사리를 종종 내주긴 했지만 훌륭한 춤에 묻혀서 그냥 패스. 솔리스트 개개인의 능력이나 반짝거림은 정말 ABT의 장점인듯.
이런저런 군소리가 많았지만 공연 전체를 두고 봤을 때 아주 괜찮은 공연이었다.
나올 때 발레의 ㅂ과도 관련없어 보이는 몸매를 한 초등 고학년이나 중딩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재밌었다' '지젤에 예뻤다' -네 엄마 뻘이란다. ^^;- 는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서 수준 높은 예술은 연령이나 국적, 교육 수준에 상관없이 통한다는 걸 실감했다.
최소한 공연 예술에 있어서는 '수준 낮은 관객들이 내 높은 예술 세계를 이해 못하고~' 등등의 변명은 절대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다만 공연 수준에 걸맞지 않는 관객과 기획사는 존재했음.
초대권을 엄청 뿌렸는지 (2층은 텅텅 비어 있었음.) 매너 없는 관객이 너무 많다.
1막에도 핸드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2막에선 미르타가 춤추는 그 긴장된 순간에 또 삘리리삐리리~ 울리면 잽싸게 끌 것이지 한참 있다가 껐는지 전화 건 사람이 포기하고 끊었는지.. 벨소리가 꺼졌다.
내 앞에 앉은 여자는 공연이 시작되고도 한참 동안 카톡질.
그렇게 카톡질이 하고 싶으면 공연장에 들어오지 말고 밖에 앉아서 카톡이나 하던가!
법을 고쳐서라도 공연장에선 핸드폰이 아예 안 터지게 하던지 해야한다. -_-+++
프로그램은 요즘 유행인지 10000원.
오늘 지젤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제 프로그램 갖고 바가지 씌운다는 이유로는 크레디아 욕을 안 하기로 했다.
만원을 받으려고 페이지수는 열심히 늘리려고 한 모양인데 내용은 하나도 없이 온갖 잡다한 사람들의 쓸데없는 인사말로 장장 10페이지를 잡아먹고 (디자인만 바꿨어도 5~6쪽 안에 다 넣을 수 있었다.) 그 흔한 무용전문기자나 평론가, 혹은 교수가 쓴 발레단이나 작품에 대한 소개조차도 없다. 이건 돈 들어가니까 뺐다고 확신함.
외부 필진에게 돈 쓰기 싫으면 자체적으로 자료를 찾아서 콘텐츠를 채워야 하는데 ABT 발레단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그나마도 제대로 번역 안하고 대충 추려서 간략하게 넣고 사진도 최소한.
여기까지는 백번 양보를 해주겠다.
그렇다면 내용과 사진을 잘 배열해서 가독성이 좋도록 디자인해야 하는 건 기본인데 그조차도 하지 않고 사진은 사진끼리 뭉텅이로, 글은 빽빽하게, 혹은 헐렁하게 모아서 대충 실어놨음.
발레단원 소개도 아마 패전트 파드데 캐스팅을 따로 빼려다가 잊어버렸거나 디자인 컨셉이 바뀌어서 그랬는지 다닐 심킨과 사라 래인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엔 8페이지에 걸쳐서 ABT는 누가 후원하고 있고 등등등~ 기획사는 어떤 회사이고 등등등~ 으로 불쌍한 나무들이 희생된 현장을 봤다.
담당자와 디자이너가 일이 무지하게 하기 싫었거나 이쪽 일을 전~혀 혹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지 싶다.
이 가격에 이렇게 욕 나오는 프로그램은 정말 21세기 들어 처음이고 이 기획사가 아닌 한 다시 만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신생인 것 같은데 예술 기획을 계속 하고 싶으면 전문가를 영입하거나 공부를 좀 더 하는 게 이 회사나 관객이나 둘 다 사는 길일듯.
새록새록 복기하니까 좋은 공연을 보고 온 엔돌핀이 사라지는 느낌이라 투덜거림은 여기서 끝.
만약 줄리 켄트의 공연이 더 있었으면 다시 예매해서 한번 더 봤을 것 같다.
올해 은퇴해버린 앙헬 코레야를 다시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줄리 언니를 본 것만으로도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