갔다온 금요일에 바로 썼어야 했는데 그때는 컨디션이 거의 유체이탈 상태. 이제 겨우 정신 차리고 잠깐 짬을 내서 다 날아가기 전에 남은 단상이라도 건지려고 앉았다.
14년만에 내한이라던가? 이전 내한 공연 때 내가 갔었는지 안 갔었는지 좀 가물가물하니 과거와 비교는 불가능. 이 단체의 공연 LD를 갖고 있어서 내겐 친숙한 단체다.
이번에 가져온 작품들은 니진스키 초연의 100주년 기념으로 다시 복원해 올린 목신의 오후를 제외하고 다 최근의 신작들이라 더 좋았다.
첫번째 작품은 크리스토퍼 브루스 안무의 허쉬.
유머러스하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그러면서 적당한 완급 조절이 있어서 현대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는 작품.
잔근육이 끝장나게 발달한 여자 무용수들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훈련을 했을지 감탄했다.
명확한 스토리가 있는 게 아님에도 관객이 상상하며 따라갈 수 있는 이런 안무, 정말 좋다.
이전 예술감독이었던 크리스토퍼 브루스는 그가 안무한 루스터란 작품을 보고 좋아했는데 이번 허쉬를 보면서 특징이랄까, 그의 시그니춰 코드가 뭔지 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
조형적이고 탄탄하면서도 괜히 겉멋 안 부리고 관객과 호흡하는 친절한 안무가~
당분간 내게 크리스토퍼 브루스는 그렇게 기억될 것 같다.
두번째는 모놀리스
그날 바로 썼으면 뭔가 할 말이 줄줄이 나왔겠지만 시간이 너무 흘러서... ^^;
라트비아 출신 작곡가라는 페테리스 바스크스의 음악이 정말 내 취향이었고 앞으로 이 작곡가의 곡을 좀 찾아서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음.
허쉬만큼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봤다.
특별히 강렬한 인상이 남지는 않았지만 지루했다는 기억은 없음.
세번째는 목신의 오후
내게 이 공연 예매를 하게 한 가장 강력한 동기.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복원한 버젼 등 영상물로는 몇번 봤지만 그래도 실제 무대가 주는 아우라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관계로 기대를 제일 많이 했고 역시 가길 잘 했다.
초연이 1912년에 있었으니 벌써 100년이 흘렀는데 지금 봐도 하나도 식상하거나 낡았다거나의 느낌이 없이 아주 짱짱하니 새것으로 보이는, 세월의 흐름을 이겨낸 걸작으로서 면모를 재확인했다.
그리스 토기의 모티브를 활용한 그 2차원 평면의 움직임을 무용수들이 제대로 구현해냈다.
목신을 춤 춘 남자 무용수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그 묘~한 분위기를 잘 낸 듯.
니진스키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장나 버린 게 정말 아쉬움.
남자의 질투가 남자들의 치정극은 여자와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이... -_-;
그리고 영상으로 볼 때는 잘 못 느꼈는데 실제로, 그것도 제일 앞 자리에서 보니 그 마지막 동작에 왜 당시 사람들이 음탕하다고 게거품을 물었는지 이해를 할 것 같음. ㅎㅎ
마지막 작품은 광란의 엑스터시.
현재 램버트 컴퍼니의 예술 감독 마크 볼드윈이 안무한, 영국에서 올해 초연한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여기엔 벌레를 싫어하는 사람에겐 보기 괴롭고, 벌레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그대로 출입문으로 달려나가게 하는 무대장치가 등장한다.
그리고 무대장치에서 짐작이 되듯 보통 일생에 단 한 번뿐인 벌레들의 교미를 연상시키는 모티브의 춤들이 이어진다.
안무가는 제의적인 춤의 회합, 원시적인 본능 어쩌고 하던데 내 눈엔 온갖 벌레들이 웽웽거리면서 짝짓기하는 걸 춤으로 세련되게 묘사한 걸로 보였음. ㅎㅎ
어쨌든 의상도 조명도 안무도 다 재미있었고 특히 개빈 히긴스의 음악은 정말 내 취향.
램버트 댄스 컴퍼니는 춤도 춤이지만 전반적으로 음악이 마음에 든다.
피로하긴 했지만 즐거운 공연 관람이었음.
그리고 공연장 안엔 아예 전파를 차단해버리는 LG 아트센터 만세~
예당과 세종도 전파차단기를 도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