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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2/인터뷰

백낙청

by choco 2012. 12. 27.

이건 오래 전에 다른 프로그램할 때 땄던 인터뷰인데...

 

대선 끝나고 지금 약 올라서 죽겠다는 백낙청 선생님의 소감을 들으니... 문득 그때 들려주셨던 주옥 같은 얘기들을 한번 복기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옮겨온다.

 

이때도 적지 않은 연세고 지금은 더더욱 많은 연세인데도 저렇게 지성을 상식을 유지하고 계신 거 보면 감탄.

 

과거엔 존경의 대상이었으나 노추가 되고 있는 몇몇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 우리가 존경하고 있는 사람들.  부디 변하지 않기를. 

 

010038 작가 대회 얘기를 하셨는데 지난 7월에 남쪽에서 문인들이 한 100명 정도가 평양에서 대회를 하고 백두산도 가고 하는 아주 굉장히 큰 행사였습니다. 0104 그런 걸 했다고 해서 남북이 갑자기 하나가 된다거나 우리 문단이 확 바뀌는 건 아니겠지만 시대의 감수성을 대변하는 그런 작가들이 직접 북에 가서 현실을 보고 북쪽에 있는 문인들과 어느 정도 교류를 하고, 그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우리 문학에 큰 변화를 일으키리라고 나는 생각을 하고요. 0126 그런데 인제 분단극복문학이라고 하는게 따로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재가 분단을 다뤄야지 꼭 분단극복에 이바지하는 문학은 아니고, 문학 본연의 길을 가면서 시야를 전 한반도로 넓히고 또 감수성이 분단이라는 현실을 생각하는 이런 감수성을 가진 문학이 바로 분단 극복에 이바지하는 문학이죠.
0156 그런 문학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0206 창작과 비평 창간 배경에 대해 질문

0209 창작과 비평 창간 작업을 한 것은 1965년에 작업을 해서 66년 1월에 창간호가 나왔습니다. 당시에는 계간지라고 할 것이 거의 없던 시기고 또 그래서 그때 나 자신이나 함께 준비했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을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리면 하나는 월간지보다 계간지를 해서 틈틈이 나오는 대신에 수준을 좀 높이자, 당시에 참여 문학 논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만 아직도 문학이라고 그러면 이 사회 문제나 역사 현실과는 절연된 이런 것을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하는 주의가 강했는데요. 거기 대해서 반발하는 참여문학론이 또 너무 좀 구호적이고 관념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0323 창비에서는 문학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면섣도 종래의 논의를 좀 종합해서 한 단계 발전시키자, 그런 취지가 있었죠.

--> 문학과 사상에 관한 인터뷰를 얻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쪽의 증인은 전멸. 그리고 한나라당 지지자인 극우 PD가 대장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아이템은 민노당 지지자인 영주씨와 지지정당 없이 안티 한나라당인 내 의지가 거의 100% 반영되어 2부는 거의 모조리 창비 계열. 선정할 때는 몰랐는데 지금 놓고 보니 조금 불균형한 것 같아 찜찜하긴 하다, 1부에선 청록파로 보강을 시키긴 했는데... 2부는 죄다 판금 아니면 사찰 대상에 올랐던 작품과 작가들. ㅎㅎ; 위성으로 받을 다른 국가들은 몰라도 이 다큐를 사다가 따로 틀 독일권에선 좋아하지 싶음. 근데 지금 독일 집권당이 사민당인가 기민당인가...? 헷갈림. -_-;;; 점점 깡통이 되어가는 것 같다.

0336 강제 폐간 등등

0351 75년이면 박정희 유신 정권이 한창이던 시절입니다. 그 때 우리가 판매금지를 사실 두 번 당했어요. 75년 봄호에는 김지하의 시를 실었다가 회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긴급조취가 1,2,3... 긴급조취가 나왔다가 잠시 풀려있던 상황이었습니다.
0427 그래서 긴급조취에 의한 판매금지는 아니고 비공식적으로 거둬들여라, 하는 명령이 내려졌던 겁니다. 그리고 여름호가 나왔을 때는 리영희 선생님의 베트남 전에 관한 글을 실었는데 그때는 긴급조취 9호가 발동된 직후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긴급조취에 따라서 판매금지를 당했습니다.
0453 그런 적이 있는데, 판매금지를 받아서 우리가 입은 손실도 컸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가 창비가 판매금지를 당했다, 하면 그 다음호가 더 팔리고요, 성과가 더 올라가고 그랬습니다. 이런 국민적인 호응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돌파할 수 있었고... 80년대... 80년도라는 것은 517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그때인제 여러 잡지들, 음란잡지니 뭐 이런 것까지 섞어서 정리를 하면서 우리도 껴서 폐간을 시켰죠.
0535 거기도 역시 우리 국민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저항하는 기운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잡지 폐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행본 사업을 더 확충할 수 있었고요. 그러다가 사실은 지금 80년대에 또 한 번의 큰 수난이 있는데, 그것은 85년에 가서 출판사 자체가 또 등록 취소를 당합니다. 그게 왜 그랬냐면 우리가 잡지를 복간해달라고 하는데 안 해주니까, 부정기 간행물 형태로 원래 창비 잡지하고 비슷하게 생긴 소위 무크지를 냈어요. 그랬을 때 당국에서 허가 없이 정기 간행물을 발간했다, 그래서 출판사 문까지 닫아버립니다. 여기 대해서 우리 문학계나 지식계만이 아니고 정계의...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계인사나 해외 지식인까지 들고 일어나서 몇 천명이 항의하는 문건을 내고 그랬어요.

-->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증언. ^^ 이 시대 얘기를 들을때며 무식한 군00란 말이 절로 나옴. 그냥 막연한 편견이 아니라 국군방송 쪽 일을 해보면 그 소리를 속으로 수천번은 한다. 우리가 황당해하는 그 군사정권 시절의 코메디들은 그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구조였음을 느끼게 됨. 군대와 얽힌 황당한 사건들은 언젠가 또 다음 기회에... 오늘 풀기에는 너무 많음.
근데... 스크립한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조취란 오타가 엄청 거슬림. -_-;;; 어차피 번역되어 영어 자막 나갈 거지만 얘기를 좀 해줘야겠다. 일일이 고치기엔 너무 많아서 생략.

-> 이때도 변절자들이나 딸랑이들은 많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지식인들이 참 기개가 있었달까.... 그런 느낌.

요즘은... 고난의 시기가 옥석 가리기에는 더 좋다는 말을 실감하고는 있다.

못 배우고 무식한 사람들이야 그게 한계려니 하지만 가장 분노하는 건 저 시대를 살아냈고, 저때 일이 벌어졌는지 뻔히 알고 겪었던 사람들이 지금 그 야만에 동조하고 과거의 회귀에 힘을 보탰다는 거.

길고 가늘고 질기게 살아남아서 다시 한 번 역사의 청소를 볼 수 있기를.

그때는 화합 어쩌고 하는 어설픈 관용 없이 프랑스의 드골처럼 깔끔하게 다 쓸어서 뿌리를 뽑아버리고 새로운 토양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첫 단추는 드골식 청산이 없었던 데서 잘 못 끼워진 것 같다.


0651 이듬에 86년에 창작사라는 ( )으로 출판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88년에 가서, 그러니까 6월 항쟁 후죠. 88년에 가서 창작과 비평사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고, 잡지도 다시 내게 되고, 이렇게 된겁니다.

0714 70년대와 현재 창비 위치 비교 질문.

0720 70년대는... 계간지는, 문단에서는 계간지가 문학과 지성도 있고, 세계문학도 있고 그랬지만은 그 당시의 민족민주 운동이라고 할까, 독재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민족통일을 지항하는 이런 큰 움직임의 한 가운데에 서있는 잡지가 창비하나 뿐이었어요.
0755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수난도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가 독점 영업을 한거죠. 0758 그래서 좀 의식이 있는 학생은 다 창비를 읽고 끼고 다녀야지 행세를 하고 이랬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대단히 편한 시기였습니다.
0811 현재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지금 그런 무슨 반독재 운동이라던가 커다란 단일(?) 운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문단에서도 여러개의 잡지가 활발하게 나오고 있고, 또 이런 진보적인 의식을 대변하는 잡지들도 많고...
0864 그래서 창비가 그렇게 독보적인 위치에 있지는 않습니다. 또 그게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요. 많은 잡지들이 활발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더 정상적인 사회죠.
00846 그러나 지금도 창비는 여전히 제일 많이 팔리고 제일 많이 읽히는 계간지이고, 그래서 거기에 부응하는 역할, 몫을 담당하고자 우리끼리 편집진에서 공부도 하고 쇄신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0915 창비와 인연을 맺은 문인들.

0928 80년대 가서는 우리가 잡지가 없기 때문에 단행본 출판으로 출간했습니다. 동시에 부정기적으로 무크라는 것도 내기도 했는데 그 당시에 그러니까 80년대에도 창비를 통해서 활약했던 문인들 중의 한 분인 고은, 김지하, 황석영 이런 분들 외에 사회 과학계, 역사학계이런 데서는 그때 우리 간판 필자라고 하면은 리영희 선생, 강만길 교수, 또 돌아가신 박현선 선생 그런 분들이었고, 가령 그때 우리 창비가 부정기 간행물로 냈을 때, 고전했을 때 거기에 사회 구성처럼 그렇게 시작했죠. 발단이 창비였습니다. 80년대는 거기다가 그때는 아주 진보적인 젊은 학자나 평론가들부터는 창비가 덜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단에서 말하자면 민족문학문제, 기왕의 나라던가, 우리 세대의 문인들이 말하는 민족문학이 너무 소시민적인게 아니냐, 하는 이런 공격에 대해서 방어하고 답변하고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뭐 그런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1125 질문

1130 김지하 선생의 경우 70년대는 우리가 잡지에 한번 실었다가 잡지가 판금당할 정도로... 80년대에 들어와서도 한동안은 그게 제대로 출판이 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와가지고 대설남이라는 것을 야심적으로 기획했는데 그것도 판금 당했죠. 그전에 썼던 시들, 70년대에 쓴 시들 주로 모아가지고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선집을 냈는데, 그것도 판금 당했고, 그것 때문에 당국에 세무 조사를 당하는 그런 일도 있었고.
1220 고은의 경우에는 감옥에 들어갔었지만 80년대에 들어서 굉장히 왕성한 활동을 했는데 시집이 창비에서 나왔지만 다른 데서도 많이 나오고 80년대 시들이 상당히 그 반향을 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 김지하씨. 본인은 원치않는 투사로, 핍박받은 예술가로 이름을 날릴 운명이었던 모양. 글을 쓰는 사람이 그것을 세상에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고통인데. 그걸 20년 넘게 겪었으니. 그런 고생을 하신 것 치고, 아니 그냥 그런 편견을 빼고 봐도 순한 분이시다. 오히려 고운 선생님이 더 투사 분위기.

-> 김지하란 이름이 이렇게 혐오와 비난이 될 줄은 그 자신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 했을 거다.

그와 김동길 교수를 보면서 아무리 외로워도 절대로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하게 됨.

1245 우리가 마포에서, 사실은 마포로 가기까지 한 열 군데, 열 번 더 이사를 했을거에요. 66년부터. 그러다가 마포에 가서는 십 몇 년을 한군데 있었는데 그러다가 파주에 이 출판 단지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래가지고 정부에서 지원을 해서 많은 출판사들이 싼 값으로 사업을 짖게 됐는데 우리도 파주에 근사한 사옥을 하나 짓고 그래서 2003년에 이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우리 사옥을 만들었고, 파주로 이사를 왔고, 그러면서 아예 출판사 이름도 종전이 창작과 비평에서 더 부르기 쉽고 친숙하게 창비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창작과 비평사를 창비로 줄여서 부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러면서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의미로는 독자들에게 더 다가가자 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1411 70년대는 반 유신 투쟁, 민주화 투쟁의 한 가운데에 계간 창작과 비평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80년대에는 그런 반독재,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싸움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우리는 계간지를 상실하고, 주로 출판 활동을 통해서 그 작업을 해왔던 시기인데, 90년대부터는 이제 기류가 많이 바뀌지 않습니까. 일단 국내에서는 87년을 계기로 완전한 민주는 아니지만 민주화의 계기가 마련됐고, 세계적으로는 80년대 말에 와서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그래서 80년대에 오히려 창비가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던 젊은이들이 90년대가면 180도 돌아서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80년대의 이념 과잉에 대해서 반발하면서 기류가 확 바뀌죠. 그런데 창비는 70년대부터 이렇게 주욱 어떤 유지해온 기조를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이 우리 창비의 특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80년대에는 이 쪽에서 너무 보수적이서 급진적으로 안나간다, 라고 비판했고, 90년대에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창비가 보수적이라고 할 때, 우리 나름의 새로워지려는 노력은 하지만은 근본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2000년대에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1611 다만 우리가 지양하는 것은 2000년도에 615 공동 선언이 있었고, 금년 들어서 그런 615 공동 선언의 실천이 가시화 되었던 그런 기미가 보이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동안 수십년간 지속 되던 분단 체제가 드디어 최종 국면에, 단계에 들어섰다, 그런 실감을 하는데, 이 시기에 분단 체제를 제대로 허물고 보다 나은 멋진 사회를 이 한반도에 건설하자는 그런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요. 1700 거기에서 창비가 70년대와 같은 독보적인 위치는 버릴지언정 어쨌든 중심에 서서 큰 공헌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1717 새로운 매체에 대한 관심.

1727 뭐 인터넷이라는 것은, 나는 이메일은 많이 쓰는 편이고, 이메일을 빼면 남이 만들어놓은 자료를 들춰보는 정도지, 그걸 빼면 그렇게 인터넷을 많이 사용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Rtv대표인데, 재단법인 시민 방송의 이사장을 맡았는데 그 때는 한편으로는 방송의 전문가가 아니지만 시민사회 갈래가 있고, 시민방송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조정해서 단합된 분위기로 보급화를 하려면 나 같은 사람이 부담을 좀 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생각을 한 것이고.
1822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매체의 세계에 더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도 있었는데 Rtv의 경험을 통해서 그런데 조금 더 익숙해 진것은 사실이고요. 그러나 여전히 그 세계에 가면은 나는 뒤떨어진 늙은 층이죠.

1903 인터넷의 속성이 대게 빨리 빨리 만들어서 빨리 빨리 읽혀지니까 아무래도 그 전의 전통적인, 오랜 전통을 가지고 발달해온 주로 이 본격 문학과는 달리 특별한 장르, 특별한 성격을 중심으로 창작되는 소설들이 있는데, 그러나 나는 본질적으로요, 본격문학은 활자로만 가고 인터넷 문학은 장르문학으로 가야한다,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1951 그러면서 오히려 같은 사람이 양 쪽을 다 하는, 이미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런 숫자가 더 많아질거고. 인터넷 문학이냐 활자문학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게 좋은 작품이냐, 덜 좋은 작품이냐를 따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다.

--> 왜 가는 곳마다 이걸 줄기차게 묻는지에 대한 의혹의 눈길이 커지고 있음. ㅎㅎ; 솔직히 이제는 필요없는 질문. 그냥 내가 듣고 싶었다. 언젠가 창비에서 로맨스가 나오는 세상이 올까? 만약 그런다면 순수문학을 비롯해 문화계가 한바탕 뒤집어지겠지. 창비가 몸을 팔았다 이런 식으로. 요는 더 좋은 작품의 생산일 것이다. 나는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런 걸 좀 쓰면 좋겠다. 그럼 나는 다큐로~ ㅋㅋ

2025 해방 직후부터 516 직전까지를 한 시기로 잡는다면... 편의상 그렇게 잡을 수도 있는데 내가 우리 역사를, 현대사를 분단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시대 구분으로는 조금 다릅니다. 그걸로 소개를 해드리면은, 나는 815와 더불어 해방이 되잖아요. 그러나 그때 분단은 굳어진 분단이 아니고 오히려 유동적입니다. 그게 이제 분단 체제로 굳어지기까지 많은 진통이 있어요. 2105 폭동도 있고, 학살도 있고, 그러다가 625 전쟁도 치르고, 그러다가 그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서 53년에 휴전을 맞이하게 되는데,
2120 거기까지를 이제 분단 체제의 전사라고 할까, 분단 체제가 굳어지기 전까지의 시기를 나타내고, 그 다음에 53년부터 87년까지, 이게 분단 체제가 냉전 체제와 겹쳐져가지고 냉전체제가 굳어지고, 그 안에서는 이제 419 라던가 중요한 계기가 되죠. 그리고 87년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보는 것은 나는 아주 적당하고 봅니다. 타당하다고 봅니다. 오랜 군사 독재가 일단 끝났죠. 물론 노태우 대통령 자신이 군 출신이긴 하지만 그 전과 같은 군사 독재는 아니고 새로운 헌법에 의해서 직선제 당선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민주화의 계기가 되고. 분단 체제라는 관점에서 보면은 이 분단 체제라는 것은 밖에서는 냉전 체제, 안에서는 독재체제 이것이 없이는 지탱하기 어려운 체제입니다. 이것이 87년에 내부적으로 민주화가 되고 외부로는 사회주의국가 몰락이라던가 냉전종식으로 겹치니까 그때부터는 분단체제가 흔들리는 시기가 옵니다. 2248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책을 내가 썼지만, 분단 체제가 흔들리는 시기인데, 이제는 2000년대는 그냥 흔들리는게 아니고 이게 끝장 나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문학으로보더래도 87년 이후로는 나는 그걸 민주문학의 새단계라는 표현을 쓰는데, 하여튼 종전과는 다르면서 문화 체제 극복에 본격적으로 이바지하는 공간이 생겼다고 보는데, 그 공간을 우리가 충분히 활용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죠.
2338 그러니까 아까도 말을 했지만, 분단 문학과 분단 극복 문학이라는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분단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의 감수성을 가지고 제대로 쓰면, 훌륭한 작품이 나오면 기여를 한 것이고... 뭐, 꼽을 수 있는 작품이 많죠. 그러나 내가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87년 이후에 변화는 사회에서 일부는 여전히 80년대식 운동권 논리, 좁은 민족문학진영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된 문학을 하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80년대 운동권 논리를 부정만 하면 되는 것처럼, 그렇게 나가고, 그래서 우리는 바라는 만큼의 성과가 안나왔다는 거죠. 성과는 많이 있죠. 내가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 그 자유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은 문학 뿐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그 기회와 에너지를 낭비해버렸다. 열효율로 친다면 30%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해야할까? 난 부정적으로 본다.
--> 2012년인 지금은 낭비 정도가 아니라... ㅜ.ㅜ  아... 참담하다.


2448 성과에 대해서...작품을 좀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할까요.

2508 87년 이후의 열려진 공간을 우리가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한 편으로는 그 때까지 민족문학을 주장하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80년대식의 논리를 버리지 못해서 경직된 자세를 버리지 못해가지고 충분한 성과가 안 나왔다는 이야기고, 또 한편으로는 80년대의 운동권 논리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반발을 하면 다른 길로만 가면 새로운 길이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하고 제대로 된 문학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라는 것이지 그 후에 우리 성과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2603 가령 그 전부터 민족문학운동에 가담했던 선배들만 들더라도 고은 시인이라던가 황석영 같은 소설가가 계속해서 좋은 작품을 냈고요. 또 80년대 운동권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던 작가들 가운데서 90년대에 와서도 그런 식의 민족문학진영에 속하지 않은 작가도 가령 내가 작품론을 하나 쓴 일이 있습니다만 신경숙의 외딴 방이라는 소설, 신경숙이라는 소설가의 감수성도 그렇고, 그 작품도 내가 형식면에서 종전하고 다른 것이지만, 나는 그게 분단 체제를 극복하는데 공헌을 한 작품이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그런 저런 사례를 들자면 너무 길어지지만 어쨌든 90년대나 2000년대 좋은 작품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봅니다.

-> 열렸던 공간이 지금 현격하게 닫히고 있는 중인데... 과연 이 시대엔 어떤 문학이 나올까? 

한 세대 정도 뒤에 이 시간을 살펴보면 문학사 쪽에선 의미있는 작품들이 꽤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인터뷰 시간과 테이프의 분량은 상당한데 내용은 그리 길지 않음. 말씀이 엄청 느릿느릿하시다. 덕분에 스크립하는 사람들은 편했겠지. ^^

1938년생인데 생각보다 굉장히 젊고 정정하심. 멋있었다. 나도 저 나이 때 저렇게 총기있고 활달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이제 슬슬 졸린다. 배가 고프지만 참고 자야지. 영양가없는 서핑과 ZUMA의 유혹을 참았다는데 스스로를 칭찬.

 

2012년.

이제 일 해야지.

종편본이 안 와서 결국 가편본으로 머리 쥐어짜내고 길이 맞춰서 넘겼더니... 에필이 대폭 수정이 됐음.

마라톤 풀코스 죽을 힘을 다 해서 뛰었는데 일어나서 다시 100m 더 뛰라는 소리다.

하긴 해야하는데.... 완전히 텅 비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