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스키 블라디보스토크 극장. 새로 지었는지 마린스키란 고풍스런 이름과 거리가 아주 먼 현대적인 건물. 입구에서 짐 검사. 금속탐지기 통과한 뒤 표 보여주고 코트 맡긴 다음에 들어갈 수 있음.
공연장 내부도 굉장히 현대적이다.
작년 가을 이후 문화 생활이란 것과 인연이 끊겼는데 (다음날 한국에서 키신 리사이틀이...ㅠㅠ) 멀리 러시아에서라도 한번 하게 됐다.
이날 점심은 스보이에서 킹크랩을 먹었는데 정말 너무너무너무 늦게 나오는 바람에 공연도 늦었다.
가뜩이나 불새는 짧은데 앞쪽이 짤리겠구나 했더니 다행히 전반부는 갈라 공연.
이런 걸 미리 공지해줬으면 갈라 한두개는 놓칠 생각을 하고 느긋하게 술도 한잔 하면서 킹크랩을 먹고 왔겠구만... 그 맛있는 걸 쑤셔넣고 온 게 너무너무 아쉽다.
각설하고 공연은 이것. 이런 허접떼기를 판다는 것에 놀라고 그래도 50루블이라는 비교적 양심적인 가격이라는데 용서.
마린스키에 금요일에는 오페라가 있었고 토요일에는 낮과 저녁 2번의 발레 공연이 있었다. 통상 저녁 출연진들이 더 낫긴 하지만 마린스키 극장에서 저녁 공연 보고 나오면 막심 택시도 잘 안 오고 택시 잡기가 만만찮다는 얘기를 듣고 그냥 낮 공연으로. 무지 추워서 현명한 선택이었지 싶다.
지휘자가 아주 훌륭했음. 솔직히 발레는 무난 평범했지만 오케스트라가 훌륭해서 귀호강으로 모든 걸 용서.
에스메랄다를 춤춘 커플을 제외하고는 다들 무난 & 평범. 여기가 마린스키 3진급 무용수들이 출연하는 곳이지만 전체적으로 참 트레이닝이 잘 된 무용수들이란 건 느끼겠음. 단, 베니스 카니발을 춤춘 남자 무용수는 제외. 발레리노로 무대에 서려면 최소한 턴아웃 스트래칭은 제대로 하고 나왔어야지. 그랑제떼 뛸 때마다 턴아웃 제대로 안 된 동작이 눈에 무지 거슬렸음.
에스메랄다 커플은 페테르부그크에 가 있어도 별 위화감이 없을 신체 조건과 눈에 확 띄는 매력을 가진 무용수들. 갈라 마지막 프로그램인 인스피레이션은 음악만으로도 황홀했다. 라흐마니노프가 공기를 울리면서 채워나가는 것 같은 느낌은 정말 오랜만. 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음악을 듣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새삼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춤도 잘 췄지만 이 시간엔 춤은 덤이었음. ^^
불새를 많이 보진 않았지만 가장 내 취향인 게 비노그라도프가 안무한 마린스키의 불새라서 혹시 그 완전 아크로바틱한 불새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새로운 안무였다.
지휘자 만세~ 오케스트라 만세~
메인 프로그램인 불새는 왕자의 기럭지가 짧아서 슬펐다. 왕자에게 비중을 확 주는 안무인데 키가 작아도 존재감이 강한 무용수들도 많건만 이 빅토르 뮬리긴은 아니었음. (이름 확인하려고 자세히 보니 내가 1부에 욕했던 그 베니스의 카니발 무용수였음. -_-+++)
불새가 왕녀였다는 설정은 잘 하면 재밌을 수도 있긴 한데... 악마 카시추이를 물리치고 왕자를 도와주는 그 매혹적인 존재인 불새가 아무 맥아리도 없는 공주가 되어버린 건 이 발레의 매력을 다 날려버리는 시나리오 설정이지 싶다.
좀 더 몰입감을 주는 무용수들이었다면 그 춤에 끌려 이런 논리의 모순을 날릴 수도 있겠으나 이날 춤춘 양반들은 그냥 음악이랑 스토리 따라가기 바쁜 수준들이라 안무의 매력(이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지만)을 살려주긴 힘들었음.
내려오는 계단. 로비에 뭔가 사진을 전시해놓고 있어서 구경하고 싶었는데 단체 관람객들이 사진 찍고 하는 통에 그냥 포기. 러시아 사람들은 진짜 발레를 좋아하는 것 같다. 관광버스 타고 단체로 엄청 와서 보고 감.
인상적이었던 건 애들도 참 얌전히 잘 보고 있다는 거. 갈라는 몰라고 불새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발레임에도 조금 부시럭거리긴 해도 주변에 방해가 될 정도인 애들은 없다는 게 진짜 놀라움. 비싼 (여기 기준으로. 한국에서 1층 중앙 중간 앉으려면 0을 하나 더 붙여줘야 가능) 자리를 샀는데 주변에 애들이 너무 많아서 'X 됐다' 욕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거슬리지 않고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이런 매너는 훈련이지 애들이라 통제가 안 되네 하는 건 내 새끼 기죽이기 싫다는 한국 부모들의 헛소리라는 것도 여기서 새삼 증명됨. 최악은 돈 아깝다고 애들 표만 사서 애들만 넣어놓고 로비에서 수다 떠는 엄마들. 예전에 UBC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에서 진짜 지옥을 맛봤었던 악몽이 떠오르네. 내 옆에 앉았던 외국 남자가 열 받아서 휴식 시간에 애들한테 "YOU MONSTERS!!!" 어쩌고 저쩌고 했던 기억도. ㅋㅋ
각설하고~ 공연 보고 나와서 금각교인가 유명하다는 다리 찍었다.
하늘은 너무나 맑고 아름답지만 진짜 추웠다. 패딩 안 가져갔으면 아마 옷 하나 사입었을듯. ^^;
10월 후반의 블라디보스토크는 3일 내내 진짜 THIS IS RUSSIA!!! 를 보여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