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는 The Seven Sins of Memory. 모처럼 원제와 번역된 제목이 똑같다.
하긴 이것보다 더 잘 팔릴 제목을 찾기도 쉽지 않을 듯. 특히나 서구에서는.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일곱가지 악덕, 혹은 죄악이라는 그 전통적인 개념에 맞춰서 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불교는 8개인가 9개였으니까 아마 이 책이 동양에서 써졌다면 한두개가 더 추가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잠깐 했다.
사나흘 계속된 미술책 읽기에 질려서 과학쪽으로 한번 튀어보자는 결심으로 작년에 사놓고 꽂아만 놓은 이 책을 골랐다. 제목을 보건데 챕터가 7개 정도로 나뉘어 있어 진도도 잘 나가고 쉽게 읽힐 거라는 예상을 했는데 생각보다는 좀 어렵다.
화성의 인류학자니 스키너의 심리상자 류의 정말 맛있는 것들만 씹어먹기 좋게 묶어 놓은 애피타이저 형식의 내용을 기대한다면 이 책은 피함이 옳다. 재미있는 사례들이 곳곳에 언급되기는 하지만 사례가 주가 아니라 일곱개로 나눈 기억의 매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들일 뿐이다. 내용의 대부분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는 기억과 관련된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해나가고 있다.
내용 자체도 그다지 쉽지 않은데다 문장도 상당히 긴 만연체고, 또 실험의 방식이나 내용이 영어의 언어체계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다른 언어권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 도출 방식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한번 더 머리를 써야했다. 주절주절 변명이 많았는데 여하튼 좀 어려웠다는 것.
씹어 삼키기 만만치가 않아서 그렇지 단편적인 사례 소개와 달리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는 텍스트 자체는 굉장히 읽을만 하다. 그리고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 대다수가 그렇겠지만- 내 기억력이나 인지 능력이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발견하며 안도하는 것도 또 다른 수확이라고 하겠다.
많은 얘기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내게 와닿았던 것 몇가지만 정리를 해보자면.
기억의 소멸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고... 정신없음에 관한 부분. 정신 빼놓고 손에 든 걸 찾는 등 엉뚱한 짓을 하는 건 거의 대부분의 인간에게 빠지지 않는 경험이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차 위에 올려놓고 운전한 음악가의 얘기는 정말. -_-;;; 하긴 천만원짜리 -그것도 거의 20여년 전이다- 플륫을 택시에 두고 내린 선배도 있었고, 요요마도 기천만원으로 추정되는 첼로 (<- 자그마치 첼로다. 플륫은 작기라도 하지.)를 택시에 두고 내린 유명한 일화가 있으니 정신 빼놓는 데는 액수가 큰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다행히 내 인생에서 이 정도로 극적인 사고는 아직 없었다. 앞으로도 없기를.
막힘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서는 마구마구 공감. 특히 떠올려야 할 것을 방해하는 다른 단어의 존재가 있다는 부분은, 이게 비판받는 이론일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적용된다.
난 '원초적 본능'을 떠올리려면 항상 긴 과정이 필요하다. 혀긑에서 맴돌면서 떠오르지 않는 이 영화 제목을 찾아내려면 먼저 마이클 더글라스와 글렌 클로스가 나온 '위험한 정사'란 영화를 항상 먼저 찾아낸다. 그리고 위험한 정사의 영어 제목과 원초적 본능의 영어제목, 그리고 샤론 스톤까지 찾아낸 다음 마지막 순간에 힘들게 원초적 본능이라는 제목을 입밖에 낼 수 있음. 몇변이나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이 병을 기억해냈고 역시나 위에 언급한 긴 과정을 거쳐서 겨우 성공, 지금은 술술 나오지만 아마 한 두어달 뒤면 또 잊어버리고 같은 작업을 해야겠지.
그리고 피암시성에 관한 부분을 보면서는 오래 전에 봤던 오프라 윈프리 쇼를 다시 떠올렷음. 당시 너무 충격적이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형제들이 있고, 한명이 심리치료를 받다가 자신이 어릴 때 부모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걸 밝혀낸다. 너무나 충격적인 기억이라 스스로 묻어버렸고 그것이 무의식에 남아 현재 자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이 심리치료 과정에서 밝혀진 요지. 거기에 너무 공감한 그녀는 다른 자매를 그 치료사에게 데려가고 같은 과정을 거친다. 줄줄이 치료사를 찾아가 이렇게 부모의 엄청난 죄(?)를 확신한 자식들은 급기야 부모를 고소한다.
그런데 그 앗싸리판 가운데 유일하게 정신이 좀 온전한 자식이 뭔가 아니다 싶어서 다른 심리치료사를 찾아가고 그 기억이 교묘한 유도에 의해 날조된 거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을 또 바른(?) 길로 인도해 다시 정신이 줄줄이 돌아와서 이번에는 그 심리치료사를 고소하는 난리가 난 것. 그 과정에서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서 그런 악덕 심리치료사들을 성토하는 장을 만들고 유도나 암시의 위험성에 대해 얘기를 했었던 걸로 기억을 한다.
지금이야 그것도 심리학과 미국의 심리치료사들이 저질렀던 치명적인 오류의 일부로 판명이 됐지만 그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피해자들이 나와 증언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게 상당히 논쟁이 되는 부분이었는데...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억울한 피해자라고 옹호한 케이스를 비롯해서 아마 꽤나 많은 피해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암시의 무서움은 독재국가에서 잘 이용하고 있는데... 여기 나온 케이스며 암시의 종류, 망각 등을 보면 전00 등등의 인간들이 너무나 뻔뻔하게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이들은 자기 암시가 확실한 인간들이지 싶다.
아메리칸 리그에서 역전 홈런을 맞고 패배한 구원투수가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지속성의 문제. 성격적인 결함이 많다는 지탄을 받지만 김병현 선수가 잘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를 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창 시절엔 사진이나 복사기 같은 기억력을 원한다. 그걸 가지면 시험에 틀릴 일도 없고 인생이 너무나 잘 풀릴 거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모든 기억을 갖고 산다는 건 저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빨리 잊어야할 고통의 기억들을 모조리 그 함량 그대로 수십년씩 쌓아서 지고 갈 수 있을까? 망각은 신에게 인간이 준 최고의 선물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
책/과학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
대니얼 L. 샥터 | 한승 | 2007.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