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에 관한 책을 더 읽다간 폭주할 것 같아서 읽다만 책을 클리어하는 쪽으로 잠시 방향을 틀었다.
듣기좋은 꽃노래도 하루이틀이지 지금 일자료만 꽂아놓은 책상 책장 한칸의 반이 그런 책들. -_-;;; 좀 쉬었다가 나머지 반을 읽어줘야지.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근현대사는 꽤 오래전에 기사를 보고 읽고 싶었던 책이다. 내내 잊어버리고 선물해달라고 했다가 꼬이고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열정보다는 구입이 상당히 늦춰진 책이기도 하다.
내용은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메이지 천황 시대부터 현대까지 한국과 일본의 여성사에 대한 기록인데 좀 더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여성수난사이다.
언제부터 착취구조가 법제화됐고 현모양처 신화가 강요되기 시작했는지, 농업화 때 이미 빼앗긴 평등이 근대화를 통해 심화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걸 회복해나가는 과정인 2005년까지가 종결.
메이지 시대에 제정된 호주법이 일본 사회의 남녀 차별을 법으로 정하고 그게 또 한국으로 넘어와 한국 사회에 고착되는 과정. 가부장적인 제도에서 여성의 인권과 지위. 관습적, 제도적 착취 구조에 하나 더 해서 식민지라는 이유로 최하위에 머물러야했던 조선 여성들의 삶과 사건들이 교차된다.
나름대로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바닥을 향해 내려가던 여성에 대한 처우는 전쟁 후를 기점으로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하는 모양인데 그 와중에 가장 눈에 들어오는 내용은 한일 양국의 소위 기지촌 여성들.
점령군의 성욕을 충족시켜주는 방파제로 민족의 순혈을 보존하기 위해 제물이 된 일본 여성들과 저만큼 거국적이진 않았지만 역시나 묵인 하에 조성된 한국 기지촌. 씁쓸한 역사인 동시에 역사 형성과 대처의 과정이 두 나라가 다른듯 닮은 구석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1980년대 이후 서술부터는 일본군에게 끌려간 조선인 여성 성노예(=종군 위안부)에 관한 진상 규명과 배상, 책임자 처벌 등에 관한 양국의 노력을 위주로 기술이 된다. 새삼 나쁜 X들이란 욕이 절로 나오고 노력하는 일본인에 대한 감탄을 하는 와중에도 왜 그렇게 뭔가 껄쩍지근 씁쓸한지. 올리버 스톤 등 그 류 감독들의. 한계를 가진 자기 비판과 고발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우리도 이렇게 반성하고 있어.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라는 자기 만족의 메시지가 느껴진다고 하면 내가 너무 꼬인 인간일까?
얘기하다보니 씹는게 되어버렸지만 최대한 객관적이려고 했던 노력은 인정한다. 이대 출신의 필진들이 상당수 끼어있음에도 김활란의 화려한 친일 행각에 대한 윤색이 없었다는 점에서 특히나. 역사란 진행형이니 미완의 책일수도 있겠지만 남성 위주의, 그리고 각기 국가주의적인 시각에서 서술해온 역사와 달리 서로의 시각을 조율해가면서 사실 위주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인 것 같다.
전체적인 내용과 상관없이 내가 주목했던 것들 몇가지만 정리를 하자면.
이 책 안에서도 나온 용어지만 그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 페미니즘이란 것은 페미니즘이 가장 빠지기 쉬운 오류이지 싶다. 여성의 인권과 평등을 주장하면서 결국은 자기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게 되는.... 귀찮아서 아무 것도 안 하는 내가 이런 페미니즘 운동 전선에 나가게 된다면 부르조아적 패배주의와 함께 가장 빠지기 쉬운 부분이 저 길일 것 같다는 점에서 더 내용이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몇권의 일본책 읽기로 이름을 알게 되어 나름 매력을 느끼고 동경했던 후치사와 노에나 라이쵸 등의 한계를 만나게 되는 것도 내게는 좋은 공부였다. 내가 20대였다면 ㅉㅂㅇ는 어쩔 수 없다. 가재는 역시나 개편이다 등등의 용어로 흥분했겠지만 이제는 인간의 다면성과 한계를 공감하다 못해 절감하는 나이에 접어든 고로... 이런 너그러운 이해심은 투쟁이나 혁명과 거리가 먼 내 지극히 현실주의적이고 자기 본위주의적인 인간성에 기인하겠지.
다 아는 얘기인데 나만 몰랐는지... 현대사를 무지 싫어한 나의 공부 부족으로 처음 만나서 조금은 충격받은 사실 두가지.
일본 정부는 한일 국교 수교를 위한 회담에 들어올 때 한일합방이 조선의 경제, 사회, 문화적 향상에 공헌한 것이고 국제법에 준하는 합법적인 조약이란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회담 중에도 배상 책임은 고사하고 오히려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남긴 재산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계속 펼쳤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선 적반하장이지만... 문제는 이런 시각이 지금까지 지속이 되고 있고 2005년에는 모든 교과서에 소위 위안부, 일본군인들의 성노예로 끌려간 우리 여성들에 대한 기록을 삭제해버렸겠지. 그런 기록이 지나가는 식으로나마 있던 내 비슷한 세대의 일본애들조차 일본이 한국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선 전혀 모르던데... 다음 세대는 과연?
생존 증언자들이 다 죽은 후를 기다리며 버티기로 시간 싸움을 하려는 의도인데 사실 저쪽에 턱없이 유리한 작전이다. 손기정 옹이 살아계신 동안 잠잠하다가 돌아가시자마자 일본인이었다는 주장들을 솔솔 하는 걸보면... 욘사마가 어쩌고 저쩌고 해도 이런 기본 시각차는 거의 간극과 같단 느낌이 든다.
또 하나는 오키나와에서 미군이 철수를 심각하게 고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도를 내놓겠다고 했던 제안. 누워서 책 보다가 기함을 넘어 거의 기절하는줄 알았다. 애국가 가사 그대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미국이 오키나와에 머물겠다고 했기에 망정이니 제주도로 넘어왔으면... 악몽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대충 다 찬성인데 반대 의견 하나는 군필자 가산점제 폐지를 승리로 표현한 대목.
그런 것때문에 페미니즘을 날로 먹자는 여성들의 널뛰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다. 그렇게 공평을 주장하면서 남자라는 이유로 군대에 내준 2년이란 기간은 왜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인지? 내가 볼 땐 모순된 논리다. 그 문제에 관한 나름의 화려한 언변과 자료들을 봤다. 하지만 마초주의와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자인 나조차 설득을 못하고 있다. 군대에 주변 남자들을 알짤없이 다 보낸 내 입장에서 그 알량한 가산점은 걔네들의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유리벽을 형성하는 것은 가산점도 필요없고 군대에 빠질 정도의 남자들이 대다수이다. 결국 만만한 놈 붙잡아 없는 놈 밥그릇 뺏는 건 남녀 모두 나대는 층의 공통점이라는 생각만... 이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발 나를 논리적으로 납득을 좀 시켜주시길.
그런데 위 사안과 전혀 관계없는 얘기지만... 의문이 하나. 왜 너무나 멀쩡하던 남자들의 대다수가 군대만 갔다오면 마초주의자에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소위 꼴x이 되어 나오는 걸까?
마지막으로 혼자 재밌어서 푸하하 하고 웃었던 대목 하나.
바람직한 페미니즘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기술이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그런데 대장금과 같은 훌륭한 예를 들면서 정 반대 입장에서 극단적인 남성주의와 왜곡된 여성관을 보여주는 영화도 나오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식의 대목이 나오는데 딱 떠오르는 이름. ㅋㅋ 그의 영화를 좋아하진 않지만 여성계에서 공적 취급을 받는 것은 또 몰랐음. 대충 몇개의 영화만 떠올려도 충분한 자격이 있긴 하겠다.
쓰다보니 책 포스팅 중에 가장 긴 기록이지 싶은데... ^^ 사진도 많고 내용도 알차고 보통 오래 전에 찜한 책은 잊어버리는데 기억하고 구입한 보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