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인가? 연도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국립 발레단에서 유리 그리가로비치 초청해서 이 작품 초연 올릴 때 캐스팅을 놓고 고민하다가 크랏수스역의 무용수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이유로 김용걸-배주윤-장운규-김주원 캐스팅이 봤었다.
그래도 이원국-김지영이라고 이원국 캐스팅을 보고 온 동생이 정말 눈물이 나는 드라마틱이었다고 하도 침을 튀겨서 살짝 아쉬웠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라 포기했었는데 이원국-김주원에 크랏수스와 예기나는 노보시리스크 발레단의 프리마들이 한다는 희소식.
공연 정보를 본 순간 빛의 속도로 예매를 했고 드디어 어제가 공연.
스파르타쿠스의 매력 중 하나가 칼날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남성 군무인데 어제는 부딪치고, 혼자 다른 타이밍에 움직이는 사람도 보이고 전반적으로 군무의 아귀는 맞지 않았음. 1막은 그 강도가 좀 어라~ 싶게 심했지만 그나마 2막, 3막으로 갈수록 나아지긴 했다. 어제 총리허설 겸 연습을 한 번 더 한 셈이니 오늘은 더 낫겠지. -_-;;;
1막에서 등장한 크랏수스를 보고 으악!!!! 초연 때 공연을 기피하게 한 그 크랏수스 무용수와 너무나 흡사한 춤을 추는... 그야말로 클론 같은 무용수. 국립 발레단의 윤모씨와 함께 나의 캐스팅 기피 0순위인 이모씨다.
크랏수스의 도도함과 귀족적인 매력은 간데없고... 산에서 나무하다 내려온 듯한 거친 춤. -_-; 1막에선 엄청나게 거슬렸지만 그나마 2-3막으로 가면서... 뭐랄까... 몇년 전 우리가 그 신모씨를 얘기할 때 썼던 '우당탕거리며 무대를 뛰어다니는' 표현 그대로의 춤이지만 그나마 아직은 힘이 좋고 열심히 뛰어다니니 그래도 볼만은 하더라. 공중동작도 섬세함은 없지만 어찌어찌 각은 나오는 것 같고. 절대 늘지 안고 자기 재능을 까먹는 대부분의 국립 발레단 프린시펄들에 비해서... 내 취향은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 늘기는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사진부터 도도하니 못된 포스를 뿜어내는 예프게니 그라첸코가 췄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내내 지울 수는 없었다.
예기나는 오호~ 정말 요요한 로마 창녀의 포스가 그대로~ 등장만으로도 시선이 확 간다고 해야하나? 요염 떠는 척이 아니라 그게 몸에 밴듯한 움직임과 시선처리.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성적인 긴장감이 높아지는 것 같다. 그녀의 그 화려함과 진~한 분위기 덕분에 파트너의 무미건조함이 상당히 상쇄된 것 같다.
프리기아는.... 본인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김주원씨에겐 그다지 적역은 아닌듯. 인물 설정이나 춤의 성격 자체도 그렇지만 예기나에게 확 밀리는 느낌. 화려하고 장식적인 역할에선 꾸미기가 가능하겠지만 정말 순수하게 무용가의 힘과 감성으로 승부해야 하는 역할에선 그녀의 한계가 드러난다. 스파르타쿠스와 함께일 때는 몰라도 혼자일 때는 별로 비극적이지 않고 밋밋했다. 96년에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정말 가슴 두근거리면서 기대를 했었는데... 결국 이 정도로군.
이원국씨의 스파르타쿠스. 긴 말 하고 싶지 않고 그가 은퇴하기 전에 봐서 다행이다. 엄청난 테크닉과 힘을 요구하는 춤과 역할에 눌리지 않고 캐릭터를 정확하게 소화해낸 것에는 감탄. 40대에 스파르타쿠스 전막을 소화할 수 있는 체력에도 또 감탄.
체력 안배를 위해서인지 1막에서는 한단계 살짝 톤을 죽인 듯한 움직임.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원국씨 컨디션이 좀 아닌가?라는 생각을 살짝 하게 했다. 그런데 2막에서부터 휙휙 날기 시작. 3막에선 그야말로 폭발. 20대 무용수가 이랬다면 욕을 했겠지만 가장 필요한 곳에 폭발시키기 위해 체력 안배를 하는 그 능력에 역시 노련미는 거저 생기는 게 아니란 생각을 했다.
코심은 변함없이 딱 예상한 정도의 연주를 보여줬음. 예상보다 더 나쁘지 않았음에 그나마 감사한다. 사실 더 이상 욕할 기운도 없다. -_-;;;
그리고 온 몸에 전율이 쫙~ 흐르는 감동 체험 하나. 무대 인사에 그리가로비치가 올라왔다. ㅠ.ㅠ 정말 이 맛에 첫날 공연을 고집하는 거지. 몇년 전에 비해 좀 더 늙기는 했지만 여전히 짱짱하신 멋진 할아버지.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힘을 모아서 하나 정도만 더 어떻게 안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