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미루다간 아예 쓰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오늘 아예 날을 잡았음.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바로 지난 주 이 시간에 설레며 들었던 음악들은 귀에 쟁쟁하다.
카테고리는 감상이지만 사실 감상보다는 키신에 대한 내 기억들의 총체적 정리라고 해야겠다.
91년 1월에 보스턴의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레코드 가게에서 키신의 첫 앨범 포스터를 봤다. 곰돌이 같은 지금 모습과 달리 비교적 야리야리한 어린 키신의 포스터를 보면서 한때 반짝하다가 사라진 수많은 신동들을 떠올리며 솔직히 좀 시큰둥했다.
자세히는 기억 안 나는데 얼마 이상 사면 어쩌고 하는 행사에 편승해 키신의 판을 한장 샀고 그때부터 말 그대로 뿅~ 하고 맛이 가서 그때부터 버닝. 결국 소리만으로 만족할 수 없서 산, 역시 어린 키신의 산토리홀 연주 비디오는 정말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보고 또 봤다.
그리고 그때부터 키신을 무대에서 직접 만날 날을 꿈꿔왔다. 하지만 바로 옆 일본은 풀방구리에 뭐 드나들듯 그렇게 열심히 도장을 찍으면서 왜 키신은 오지 않는지. 내가 쫓아가야 하나 했던 열정도 슬슬 사라지고 이제 오거나 말거나 하는 포기의 시기에 들려온 소식. 키신의 내한공연. 당연히 다시 불타 올랐다. 레퍼토리는 좀 많이 내 취향이 아니지만 그래도 첫 방한은 키신의 연주를 직접 듣는다는데 의의를 두고 불평을 관두기로 했음.
그러나 자꾸 예매 오픈이 연기되고 어쩌고 하면서 한국 온다고 했다가 펑크낸 수많은 연주자들의 선례도 떠오르고 내내 엄청 불안해하다가 결국 예매에 성공했고 그리고도 다섯달 가까이 기다려 가슴 두근거리며 예당으로 갔다. 황사가 엄청났지만 그것조차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드디어 등장한 키신. 엄청나게 부풀린 머리를 나폴거리고, 곰인형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덩치와 귀여움을 풍기면서, 러시아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등장. 피아노에 앉았다. 객석의 긴장과 집중을 유발시키는 모션도 없이 바로 건반에 손을 올려 첫음을 누르기 시작한다.
첫번째 곡은 베토벤 소나타 3번.
고백컨데 베토벤도 교향곡을 빼고는 별로 선호하지 않고 이 소나타도 좋아하는 곡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 교육적 배경의 특성상 여러가지 수준의 연주로 꽤 많이 들어서 귀에는 익었다. 이 곡이 베토벤의 초기 소나타긴 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너무너무너무... 듣는 사람이 허탈할 정도로 쉽게 친다. -_-;;; 들으면서 감탄 이전에 '아니, 이렇게 쉽게 쳐도 되는 거야?' 라는 약간의 허탈감과 질투 섞인 상념이 떠오를 정도로 편안하고 유려한 진행. 내가 피아노 전공자였다면 완전 좌절 모드에 빠졌거나 샘이 나서 혈압이 빡빡 올랐을 것 같다.
악장 사이에 쏟아져나오는 그 어마어마한 기침 때문에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생리적 현상은 어쩔 수 없지. 더구나 그날 황사가 좀 무지막지했어야지. 키신도 이해해주길 바라며 패스.
두번째 곡은 역시 베토벤의 소나타 26번. 고별.
이 곡도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거짓말 안 보태고 수십번은 들었을 거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보충하자면 내가 열심히 음악을 듣는 감상자라서가 아니라 예고는 3년 내내 향상이라고 해서 한 학기에 2번씩 연주를 해야한다. 그리고 나머지 학생들은 그걸 다 들어야 한다. 그외에 출석도장 찍어야 하는 음악회 등등까지 합하면 이런 필수곡은 못이 박히게 된다.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은 100번도 넘게 들었을듯. -_-;;;-
제목은 상당히 애절함이나 절절함이 있어 보이는데 반해 실제 이 곡은 그다지 감정에 호소하는 면이 없다. 그래서 처음 들었을 때 엄청 실망했었다. ^^;;; 키신이 연주하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감성의 자극은 역시 없었음. 그러나 참 정갈하고 깔끔하게,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친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베토벤이 원했던 연주가 이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같은 시간 현장에 있었던 다른 모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들었다고 하니까 이건 둔한 내 감성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고전과 낭만의 기악곡을 들으면서 감동한 적은 거의 없으니. ^^;;;
2부 프로그램은 쇼팽.
스케르초1번부터 4번까지를 연주했다.
예전에 부닌의 쇼팽을 들으면서 그 파격적인 해석에 거의 당혹감까지 느꼈었는데 키신의 스케르초 1번에서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어느 교수의 제자냐에 따라 거의 찍어낸 것 같았던 몇 종류의 해석과 내가 가진 몇개의 판에서 듣던 어느 스케르초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독특한 프레이즈 분할. 저렇게 끊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처음에 그 낯설음 때문에 굉장히 어색했지만 반복되면서 저런 해석도 가능하구나, 저렇게 끊어 나가니 또 저런 매력이 있구나 설득이 되기 시작한다. 여하튼 1번은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요약하고 싶다.
2번은 거의 기대했던 바로 그 쇼팽이었다. ^^ 가장 유명한 이 2번에서 풀어나가는 동기와 리드미컬한 프레이즈 처리는 미소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풍부하고 예뻤다. 반응도 가장 좋았다고 할 수 있음. 나중에 키신의 연주를 갖고 얘기할 때 가장 많은 얘기가 나온 것도 바로 2번이었다. 나도 오랜만에 멋진 2번을 실황으로 들을 수 있어 아주 행복했음.
3번과 4번은 솔직히 특별한 기억은 없다. 참 잘 치는구나. 정말로 쉽고 편하게 친다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 연주가 끝나간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했던 것 같다. 바꿔 말하면 이런저런 잡생각도 없는 몰입의 순간이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내게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억될 그런 쇼팽은 아니었다.
본 프로그램이 끝나고부터는 내가 예당을 다닌 이래 최대의 환호. 그야말로 무슨 콘서트나 아이돌 스타의 공연장에 온 것 같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앵콜에 후한 키신의 특성상 한 4곡 정도는 해주리라 예상을 했다. 그 정도는 당연히 듣고 가야 한다는 각오로 열심히 박수를 쳤는데 역시나 앵콜 받아주기 시작~ ^^
첫 곡은 스크리아빈인가 했는데 시마노프스키의 에튜드였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키신이 치는 시마노프스키의 피협을 듣고 싶다는 욕구가 무한 상승.
두번째 앵콜곡은 쇼팽의 에튜드. 깔끔했다.... 정도?
세번째는 확신할 순 없지만 역시 쇼팽의 왈츠. 여기선 낭만에 잘 움직이지 않는 나도 감동. ㅠ.ㅠ
그 다음 곡도 쇼팽이었던 것 같고... 쇼팽의 마주르카와 리스트로 짐작되는 랩소디 한곡 등을 포함해 장장 10곡의 앵콜을 해줬다. 특히 마지막의 재즈풍 곡은 정확한 곡명을 알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 경쾌함이라니. 역시나 키신이 치는 랩소디 인 블루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퐁퐁퐁.
열광하는 분위기와 착한 연주자의 후함에 기대어 연주 중간에 사진 찍어대고 녹음하고, 동영상 찍어댄 인간들에게 모두 저주 있으라!!!!! 정말 기본이 안 된 인간들만 없었다면 감동이 더 컸을 텐데. 지금 쓰면서도 다시 열이 팍팍 오른다. 키신 연주 끝난 뒤에 검색해봤더니 그렇게 찍어온 것들이 역시나 블로그에 마구 올라가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자랑스럽게. 도대체 개념은 어디로 보낸 것인지. -_-;;;
사실 한 6곡 정도 들은 다음부터는 미안해서 이제 그만하고 떠나도 돼~라고 속으로 외쳐줬다. 무대 뒤에서도 이제 그만 해도 된다고 불 켜자고 했지만 키신이 10곡까지는 해보겠다고 자기가 말렸다고 한다. ㅠ.ㅠ 그 말 듣고 더 사랑하게 됐다.
이것도 들은 얘기. 이번 독주회 전에 키신이 앵콜곡을 4곡을 연습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관객이 열광적이라서 그걸로 만족하지 않을 거란 얘기를 듣고 한곡을 더 추가해서 연습을 했다는데 나머지 다섯 곡은 그럼? 무대 뒤에 있었던 사람의 얘기에 의하면 혼자 벽 보고 흥얼흥얼 곡을 노래를 해보더니 그냥 무대로 나가서 치더라고... 역시 천재 소리는 아무나 듣는 게 아니다.
내 클래식 콘서트 일생에서 가장 길게 커튼콜하고 박수친 날이었음. 본편보다 후편이 더 좋긴 했지만 전체 연주에 대한 만족도도 엄청 높았고.
며칠 전 키신 공연에 관해 얘기를 하다가 모 아트센터의 모씨는 "테크닉 과시만 있고 감동이 없어."라고 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키신에 대한 호감도를 젖혀놓고, 객관적으로 볼 때도 한마디로 흥!이다. 이번 공연엔 테크닉을 과시할 수 있는 곡 자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토벤 3번이 약간 까다롭긴 하지만 프로페셔널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그 곡을 갖고 테크닉이 어렵네 어쩌네 하는 건 말 그대로 '나 바보야!' 하고 외치는 것과 똑같다. 그랬으면 내가 할렐루야를 불렀을 리스트나 프로코피에프, 혹은 스크리아빈 위주로 짜여진 프로그램이라면 레퍼토리만 놓고 봤을 때 그런 의도를 의심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키신의 공연은 과연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정말 정직한 아카데믹한 프로그램이었다.
가장 만만하고 갖다 붙이기 좋은 비평이 테크닉은 있는데 감성이 없어 어쩌고. 그것은 점집 찾아가면 "내년에 인연이 생길거야." 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지. -_-;;;
혹시나 하고 물어봤더니 그 모씨는 역시나 성악 전공자. 꼭 음정도 제대로 못 맞추는 것들이 티를 낸다고 해버렸다.
누워서 침뱉는 얘기지만... ^^;;; 작곡이나 이론 전공자들은 기악 전공자들을 무식(-_-;;;)하다고 무시하고 기악 전공자들은 또 성악 전공자들을 음감 하나도 없고 시간 개념 없다고 무시한다. ㅋㅋ 이 묘한 무시의 고리가 언제 시작됐는지 모르겠지만 끊어지지 않고 계승되고 있는데 오랜만에 대화에서 그 오랜 편견(?)을 내뱉으니 우스웠음. 10년 가까이 떠나 있어도 출신 성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_-;;;
얘기가 엄청 샜는데... 여하튼 결론은 하나.
키신 빨리 돌아와 줘요~~~~~ 이왕이면 무소르그크스키나 라흐마니노프를 갖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