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그너란 이름과 니벨룽의 반지를 처음 안 것이 언제인지 명확히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집집마다 필수 아이템으로 있던 소년소녀 세계 문학 전집에 빠지지 않고 끼어있는 북구 동화 덕에 보탄(=오딘)의 존재는 내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들을 한때 버닝하게 했던 그 올훼스의 창이란 만화 덕분에 크림힐트가 여주긴 했지만 지크프리트의 전설도 익숙한 내용. 그래서 비교적 쉽게 바그너의 링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낭만적인 비극이 어떻게 무대에서 펼쳐질지에 대한 상상도 많이 했었다.
독일 바이로이트란 곳에서 매년 바그너 한 사람의 작품이 연주되는 축제가 열리고 그곳에선 이 반지가 나흘간에 걸쳐 공연이 된다. 그리고 그 공연을 보러 온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그곳에 가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하지만 해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었지 절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당시 내가 생각하던 나의 유학지는 전혜린이 머물렀던 독일 뮌헨이었기에 쉽게 갈거라는 계산도 있었고.
나이를 먹고 대학에 가면서 영상물과 사진들이 가득한 서적에 노출이 되면서 바그너 가수들을 보고 최초의 환상이 완전히 날아가는 경험을 했다. 이영자나 오천평이 저리 가라인 우람한 아줌마 아저씨들의 대행진. -_-;;; 노래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엘자~ 고귀하고 순결한 브룬힐데 어쩌고 저쩌고 해도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와의 부조화라니.
특히나 그 비르기트 닐센 아줌마의 노래와 몸매의 부조화는 나를 거의 경악의 경지로 몰아넣었다. 칼라스나 테발디는 예쁘고 노래도 잘 했다고. 자~알 생긴 유시 비올링이며 코렐리, 마리오 델 모나코는 왜 바그너를 부르지 않는 것이냐! 이렇게 울부짖었다.
그런 최초의 충격을 수습하면서... 인간은 역시 회복이 빠른 동물인지 그냥 바그너 가수들은 다 그러려니~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
새롭게 니벨룽의 반지를 보고 싶다는 소망이 진지하게 자라기 시작한 것은 교양영어 수업 때. 그때 바그너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세상에 다시 없을 허풍장이에 바람둥이고 가장 친한 친구의 아내를 빼앗을 만큼 도덕심이나 신의도 없다. 그리고 자신의 피부는 공단보다 더 거친 것은 감당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빚으로 파묻혀 죽을 지경임에도 공단 속옷을 입었던 남자가 있다... 대충 이런 내용으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이런 신랄한 험담으로 시작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수 밖에 없는 바그너란 남자에 대해 적은 내용은 나를 살짝 바그네리안의 길에 입문시켰다.
더 중요한 수업과 시간이 겹쳐 조금 듣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바그너 음악 연구 이후 링은 내가 꼭 봐야만 하는 must have 아이템이 되어 버렸다. 한국에서 니벨룽의 반지 전막이 공연된다는 것은 내가 로또 복권 당첨이 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확률이라고 생각했기에 내 꿈은 60살이 되면 바이로이트에 가겠다로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었음. ㅎㅎ; 비록 독일의, 그 무시무시한 바그너 집안의 감독 아래 만들어진 링은 아니지만 어쨌든 링은 링이다.
예매를 해놓고도 cmi나 세종문화회관의 화려한 전력상 막판에 공연이 취소되거나 아니면 다리가 부러졌다거나 심한 몸살 감기 등등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주연들이 줄줄이 하차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이런 걱정을 안할 수가 없는 것이... 작년에 공연한 오페라 중에 온다던 사람이 제대로 온 건 리골레또의 누치가 거의 유일무이했음. 이 아저씨도 얍삽하게 머리 쓰면서 표 덜 나는 곳은 대충 노래 불렀다. -_-;;; 기획사가 찐따이니 한국 사람들까지 똑같은 줄 아는 모양
그런저런 걱정을 다 날려주듯 게르기예프 옵빠~가 카리스마를 휘날리며 대머리도 멋있어 보이긴 처음이다. ㅎㅎ 오페라단과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한국으로 날아와줬음. 자주 와주세요~ 그때는 돈 더 벌어서 1층에서 찾아 뵐게요~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볼 때 가장 쉬운 잣대는 피아니시모다. 포르티시모는 어지간하면 대충 다 내고 사실 엄청나게 수준 차이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피아니시모는... 너무나 적나라해서 잔인할 정도다.
그런데 이들의 라인의 황금 시작 부분. 그 첫 화음. 실을 가늘게 뽑아내는 듯한 그 피아니시모. 누군가는 너무 가볍다는 얘기를 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피아니시모를 어떻게 내라고? 엔지니어가 맘먹고 cd로 만들어낸 음이나 이상 속에 있는 음을 찾아나서라고 해주고 싶었음.
첫인상에 많이 좌우되는 편인데 말 그대로 한대 얻어맞은 상태라 라인의 황금에선 이미 감동받을 자세가 딱 되어 있었다.
게르기예프의 라인의 황금은... 정통 바그너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방정맞을 정도로 스피디하고 조명을 많이 활용한 연출이다. 니벨룽의 반지 영상물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어느 게 정통인지 모르겠지만 기존에 봤던 다른 것에 비해 연극적인 부분은 오히려 절제가 된 느낌. 그러나 워낙 조명과 무대를 능란하게 사용해 절대 지겹게 느껴지지 않는다.
곱추 난장이 알베리히를 조롱하다가 라인의 황금을 빼앗긴 라인의 세 처녀. 발할라 성을 지어준 댓가로 청춘과 아름다움의 여신 프레이야를 요구하는 거인들. 그 거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 꾀를 내는 로게에 의해 라인의 황금으로 사랑을 포기한 알베리히가 만든 절대 반지의 얘기가 신들에게 알려지고. 거인들이 요구한 금과 반지를 찾기 위해 니벨룽으로 내려가는 신들의 왕 보탄과 로게. 속임수를 이용해 절대 반지를 빼앗지만 알베리히는 반지를 가진 자는 다 멸망하리라는 무서운 저주를 건다. 반지의 마력을 자신의 것으로 하려던 보탄은 대지의 어머니 에르다의 예언에 따라 반지를 거인들에게 넘기고. 반지를 놓고 거인 파졸트와 피프너 형제는 싸움을 벌여 파졸트는 죽는다. 결국 저주가 시작된 것. 그리고 신들은 거인들이 지어준 발할라 성으로 들어가면서 라인의 황금은 마무리 된다.
본래 바그너가 서장과 3개의 악극으로 구성했다고 하는데 이날은 서장이 연주된 셈.
독일이나 러시아에서 게르기예프의 링을 보고 온 사람들이 혹평이건 호평이건 공통으로 '지겹지는 않아' 라는 말을 했는데 역시 예상대로 스피디한 진행. 2시간 40분 동안 엉덩이 한번 떼지 못하고 꼼짝없이 공연을 봤어야 했음에도 전혀 지겹지가 않았다.
대다수 현대인들의 한계 시간인 2시간을 즐겁게 넘기도록 한 게르기예프의 능력과... 모든 사람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구상을 한 바그너의 오만방자함에 잠시 감탄. ㅎㅎ
실제 오페라 공연에 와서 가수들의 연기나 노래에 조마조마하지 않고 그냥 극에 몰두해서 본 것이 얼마만인지? 바스티유에서 본 세비야의 이발사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미메가 예상보다 약했던 것을 제외하고 가수들의 역량은 리모델링을 했음에도 도대체 돈은 어디다 썼는지? 크게 나아진 것 없는 세종의 열악한 음향 시설을 압도했다. 3층까지 짱짱하게 날아오는 그 묵직한 소리라니. 때때로 소리가 광선이 되어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까지 느끼게 했다.
특히 알베리히를 맡은 에뎀 우메로브와 피프터의 게네디 베주벤코브는 환상 중에 환상. 테너는 이태리, 바리톤은 독일, 베이스는 러시아라고 하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다. 베이스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진수를 보여주는 베이스였다. 귀를 버려서 당분간 동양권의 베이스 가수들 노래는 들어주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아틸라 전은 빼고. ^^ 스타일은 좀 다르지만 그 아저씨도 바그너에 딱인 베이스
첫날 라인의 황금에서는 전체적으로 독보적인 남자 가수들에 비해 여자 가수들의 역량은 기대했던 것만큼의 짜릿함은 느끼지 못하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떤지 잘 모르겠고... 다음날 발퀴레에서 순간순간 느꼈던 그 찌릿찌릿함에 이날은 여자 가수들의 노래에서 없었음.
오케스트라 얘기로 돌아가자면 키타옌코가 끌고왔던 그 90년인가? 89년인가? 정확히 모르겠음 볼쇼이 오케스트라 이후 최고였다. 악기가 터지도록 포르티시모를 내라는 말을 오케스트라 할 때 수없이 들었는데 그게 어떤 소리인지 현장에서 처음으로 들었다. 금관악기에서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삑사리와 다른- 정확한 음가로 터져나올 때의 그 심정은 설명하기 힘들다.
감탄, 부러움, 놀라움 등이 마구 뒤섞인 복잡한 심경. 아마 이건 수준은 달라도 인정하기 싫다. ㅠ.ㅠ 나 역시 한때 같은 업종에 종사했던 동종업자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와닿지 않았을까? 정말 무시무시한 피아니시모와 포르티시모였음.
전성기의 볼쇼이 오케스트라 내한 때도 이 사람들의 피아노부터 포르테까지의 간격과 폭이 엄청 넓고 파워풀하다고 느꼈는데 상대적으로 클래시컬하다는 마린스키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라인의 황금을 들으며 뜬금없이 이들이 연주하는 쇼스타코비치와 글링카의 류슬란과 류드밀라가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별 영양가도 없는 소리를 엄청 길게 쓴 것 같다. 발퀴레부터는 짧게 쓸 예정. ^^
오늘은 드디어 나의 지크프리트를 보러 감~ ㅎㅎ
자야겠다~
감상/음악
니벨룽의 반지 - 1부 라인의 황금(2005.9.24)
드디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