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W.오닐, 헨리 C.리 (지은이), 정영문 (옮긴이) | 북앳북스
이런 류의 책을 잘못 고르면 3류 미스테리 소설처럼 재미도 없는데다 내용까지 허술한 경우가 많아서 상당히 조심스러운데 이 책은 법의학으로 유무죄가 가려진 사건의 케이스를 아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런 건조함 때문에 강렬한 드라마를 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혹평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내게 이 책을 사도록 만든 리뷰를 보고 했다. 그 리뷰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으로 조목조목 짚었던 내용들은 정작 내가 원하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래서 Thanks to를 주저없이 날려주고 구입. ^^
원제는 Cracking Case 로 2002년에 출판됐지만 이 책에 인용된 사례들은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있었던 일들이다. 10년 이상이 흘렀으니 그 이후 법의학쪽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은 당연히 할 수 있을 것이고 가장 최신의 현대 법의학이 어디까지 와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 알아보려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내용은 간단하다. 닥터 헨리라는 대만 출신으로 미국에 이민 가서 자리잡은 법의학자가 자신이 관여했던 살인사건 케이스 중에서 대표적인 것 5개를 추려서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써놨다. 사건의 내용과 교묘하게 은폐하려고 했지만 남은 증거로 인해서 사실이 파헤쳐지는 과정을 서술하고 (각 사건의 앞뒤 정황과 부부관계, 이웃간의 관계를 보면 픽션은 절대 논픽션의 드라마틱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됨) 거기에 사용된 법의학적인 지식과 내용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해주는 형식이다.
이 책의 저자도 인정하지만 법의학과 과학인 모든 걸 밝혀주지는 않는다. 실제로 과학적으로 배심원들을 납득시키는데 성공해 유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끝끝내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살인자도 있고, 헨리 박사가 피의자 편에서 진술했던 O.J 심슨의 경우는 그는 무죄로 풀려났지만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다. <-- 이 부분에서 닥터 헨리는 초기에 사건 현장의 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누누이 강조를 하고 있다. 다른 케이스 정도로만 보존이 됐어도 길게 끌 것 없이 범인이 단번에 가려졌을 거라는 아쉬움을 표명.
범죄를 가리는 법의학에 대한 조금은 뒤쳐진 감이 있는 지식을 얻는 동시에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아주 건조하게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데도 피와 살인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스릴러보다 오히려 더 오싹하게 하는 면이 있다고 할까. 안락하고 평온한 꿈자리와 인간 -특히 배우자-에 대한 신뢰를 키우는 데는 결코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니다.
아주 깔끔하고 간결하기 읽기 좋은 번역이라 번역자의 경력을 찾아보는 수고를 했는데 소설가였다. 소설가라면 오히려 화려하고 문학적인 묘사를 하고 싶은 충동이 강했을 텐데... 읽는 입장에서는 그 유혹을 자제해준 걸 감사한다.
근데 이 책으로 삘을 받아서 법의학 관련 서적에 대한 유혹이 밀려오고 있음. =.= 리스트를 한번 뽑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