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위 때 나름 머리 쓴다고 바닥이 아주 두꺼워 오래 걸어도 괜찮은 나인 웨스트 구두를 신고 나갔다가 거리에 오래 앉아있는 통에 몇번 신지도 않은 새 구두가 아스팔트에 까져서 완전 헌 게 되어버렸다. <-- 이건 진짜 이메가 때문이다. 내 나인 웨스트... ㅠ.ㅠ
그렇지만 회의에 운동화를 신고 나갈 수도 없는 거고 또 내가 외출 때는 절대 운동화를 신지 않는다는 걸 부친이 알기 때문에 회의와 상관없이 나갈 때도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면(가정의 평화를 위해) 구두를 신을 수밖에 없다.
오늘도 회의 이후에 미사를 갈 예정이라 패션을 놓고 한참동안 고민. 바닥에 주저앉아야 하니 흰바지는 불가능이고 청바지는 회의에 좀 거시기하니 검정바지. 더운 날씨를 감안해서 시원한 웃도리를 찾다보니 검정 일습이 됐다.
이런 경우 내가 애용하는 코디는 작년 11월 카드비 갚느라 내 허리를 휘청하게 했던 오픈 토의 그라데이션 프라다 구두님에다 동생의 청동색 코팅이 된 프라다 빅 숄더백님인데 아무리 신부님들이 계셔도 저 짐승들을 믿을 수 없는 터라 패스. 오전에 채팅으로 입고 나갈 옷을 동생과 상의하는데 만약 그 프라다 백에 눈곱만큼의 흠이라도 간다면 당장 한국으로 날아와 경찰을 고소하겠다고 펄펄. ^ㅅ^;;;;
다음 선택은 노란색 루루 기네스 가방과 열심히 할부를 갚고 있는 질 스튜어트 금색 샌들. 근데 루루 기네스 가방은 천이라서 저 똥물대포가 한방울이라고 튀기면 수선이고 뭐고 바로 저 세상으로 보내줘야 한다.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결국 세탁이 가능한 클림트 키스 그림이 프린트 된 헝겁 가방으로 낙찰. 가방에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구두는 중간에 다시 들어와 갈아 신을 요량을 하고 나갔는데 회의가 늦어지고 어쩌고 하는 바람에 그냥 신고 나갔다가 시청 광장에 쭈그려 앉아 미사 드리는 내내 엉덩이가 허옇게 되거나 말거나 질 스튜어트 구두를 사수. ㅎㅎ; 나갔던 모습 그대로 데리고 들어왔다. 대신 엉덩이 아래는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상태....
운동화처럼 편안하면서 정장 분위기가 나는 토드의 단화를 조만간 구입해야 할듯. <-- 이것도 이메가 때문이다. ㅠ.ㅠ
일요일까지만 해도 정말 절망스러웠는데 이런 태평스런 포스팅을 할 수 있는 여유는 오늘 미사에서 받은 힘인 것 같다.
어제 의료봉사단에 약품이 모자란다는 글을 읽고 몸으로는 못 보태니 돈이라도 보태야겠다 싶어서 필요한 약품을 사주려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오늘 낮에 전화를 하는데 왜 그렇게 떨리는지. 필요한 물품을 받아 적으면서 이 전화 때문에 나중에 어디 끌려가는 게 아닐까 덜덜. 사러 가면서 약국을 돌아다니면서 의심받지 않게 조금씩 현금으로만 사야하는 게 아닐까 내내 고민했었다.
사실 어제 계획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멀리 갔을 때 공중전화로 연락하고, 약국들을 돌아다니면서 하나씩 사서 모으는 거였다. 그러다가 반쯤은 오기로 그냥 한곳에 들어가 왕창 사고 카드로 지르고 왔다. 내 요구물품과 사가는 수량을 본 약사의 표정을 보건대 그게 어디에 쓰일지는 대충 짐작을 하는 눈치. 근데 4천원이나 깎아준 걸 보면 최소한 찌르지는 않겠지. ㅎㅎ 흔적을 줄줄 남기고 온데다 여기다 포스팅까지 했으니까 잡으려고 들면 뭐. 잡혀줘야지.
근데 약국에서 나오는데 길에 서있는 경찰차를 보면서도 왜 그렇게 떨리는지. 누가 보지도 않는데 쇼핑백을 가득 채운 약품 위에 자료로 받은 종이를 뒤집어씌워 가면서 전철에서도 내내 떨었다. 오늘 들를 곳도 여러 군데고 많이 걸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요란을 떨면서 차려입고 나갔던 건.... 샤방하게 차려입은 하이힐 신은 여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검문 검색이 덜했던 시대를 거쳐온 본능적인 자기 방어랄까.
소설 태백산맥에서 빨치산들을 위해 약품을 사던 사람들의 심리를 묘사하던 그 글을 실제로 체험하는 하루였다. 오늘 내가 사준 그 약품들이 쓰이지 않으면 좋겠다.
여하튼 몇년째 유지하던 냉담을 풀었고 시간 나는대로 시청에 나가서 미사를 드리기로 했다. 이번 주에도 이메가가 정신을 안 차리면 토드 단화 진짜 사야겠다. 안 그럼 내 다리가 먼저 아작이 나겠음.
온갖 헛소리가 난무했는데 오늘의 결론은 신부님 감사합니다. 어제까진 암흑이었는데 오늘은 빛을 봤다. 이제 그 빛을 지키기 위해서 힘을 내야지. 나한테 힘내라는 의미로 주말에 주문한 종합 영양제가 오면 열심히 먹어줘야겠다.
잡설
된장스런 단상.
주로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에게 회의는 모처럼 꽃단장을 하고 인간다운 모습으로 밖에 나갈 기회이다. 원체 좀 게으른 인간이라 나갈 일이 있으면 한꺼번에 모는데 그 마지막 코스에 촛불 시위가 종종 끼게 되면서 나의 샤방한 외출 전선에 먹구름이.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