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인가 예술의 전당에서 초청했던 이후 장장 12년만의 한국 나들이를 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당시 풋풋했던 이름들이 이제는 노장으로 분류가 되고 기대했던 앙헬 코레야는 부상으로 내한이 취소되기까지 했다. 하긴... 어찌 보면 다행인 게 만약 오늘 앙헬 코레야가 무대에 섰다면 난 내일 예매한 것과 상관없이 출혈을 감수하고 오늘도 세종문화회관에 가서 앉아 있었을 거다. ^^
오프닝 갈라에서는 두 작품을 해줬다.
1부 작품은 ETUDES.
1948년 헤럴드 랜더가 안무한 작품인데 코펜하겐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초연해다는 정보를 보건데 아마도 데니쉬 로얄 발레단을 위한 작품이었지 싶다. 발레단에서 날마다 이뤄지는 일상적인 바 클라스에서 센터 클라스로 거기서 무대로 이어지는 그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솔직히 처음에는 예고나 예원 무용과 발표회 때 너무나 많이 보던 설정이라 좀 시큰둥했는데 점점 지나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빠져들게 된다.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구성인데 지치지도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집중력을 유지해주는 무용수들을 보면서 역시 ABT라는 생각을 절로 했다.
특히 마르첼로 고메스에게 꽂혀서 내내 눈에 하트를 그리면서 황홀경을 헤매다왔음. ㅎㅎ; 잘 생긴데다가 춤까지 잘 춰주시니 뭐 확 갈 수밖에. 반대로 미셀 와이즈는 기대보다 좀... 신체조건도 좋고 시원시원하니 안정된 춤을 보여주기는 하는데 상체가 너무 단단하다고 해야하나 굳어있다고 해야하나. 보는 내내 뭔가 좀 딱딱하다는 느낌에 영 불편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발레리나보다는 체조선수 같았던 것 같다. 그녀때문에 전형적인 미국 발레리나들의 폴 드 브라는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예쁘지 않다는 편견을 계속 유지해갈 것 같음.
드라마가 있고 스토리가 있는 작품을 선호하는 편이라 이런 춤의 나열에는 쉽게 지루해하는 내가 전혀 지루함없이 봤다는 자체만으로도 정말 괜찮았지 싶다.
그렇지만 키로프나 볼쇼이 스타일의 비인간적으로 느껴질만큼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군무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좀 산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도 초반에는 약간씩 타이밍이 어긋나는 움직임이 거슬렸었다. ABT답게 발랄하고 화려하고 미국다운 시원시원함을 잘 즐기긴 했는데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이 작품 공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이런 화려하면서도 딱딱 맞아떨어지는 호사스런 반짝거림은 역시 파리 오페라가 최고지. ^^
20분 휴식하고 2부는 Rabbit and Rogue.
직역을 하자면 토끼와 악당인데....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대충 의역을 하자면 겁쟁이와 악당 내지 겁쟁이와 건달 정도? 트왈라 타르프가 안무한 작품인데 안무가를 모르고 봤더라도 '트왈라 타르프 스타일이군'이라는 생각을 틀림없이 했을 것 같다. 그만큼 그녀의 전형적인 스타일에 따른 움직임과 유머 감각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작품이었다. 만약 내가 타르프의 작품을 많이 봤다면 '식상해!' 라는 불평을 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몇 개 보지 않은 관계로 감사하게 제대로 보여주는 트왈라 타르프의 작품을 즐겼다.
거기다 에단 스티펠과 헤르만 코르네호라는 ABT의 두 프린시펄이 한 무대에 섰는데 뭔들 감사하지 않으랴. ㅎㅎ 뮤지컬이나 대중가수 공연도 아닌데 발레에서도 관객의 박수를 유도해내는 에단 스티펠을 보면서 역시 고수는 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음. 거기다 데이빗 홀버그도 계시고. 이 아저씨의 이기적인 기럭지는 진짜 경탄. 세상에 질리안 머피가 아담해 보이다니. ^^ 진짜 ABT라서 가능한 캐스팅이고 또 이런 작품을 한국에서 제대로 보여줬다는 것에 감사. 나의 발레리노 편애 모드 때문에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데 사벨리에프와 2인무를 춘 여자 무용수 폴 드 브라가 정말로 예뻤다. 팔만 들어도 음악이 흘러나오고 상체의 움직임이 황홀하다는 표현을 오랜만에 떠올렸었음.
이 작품 초연 때 산만하다는 평을 많이 받았던 것 같은데 내 취향에는 적당히 가볍고 여름밤에 즐기기 딱 이상적인 작품이었다. 초대권을 많이 뿌리지 않았는지 객석 분위기도 모처럼 깨는 사람 없는 관람 예절에다 호응도 제대로 해주는 상황이어서 1부 50분, 2부 50분 내내 행복했음.
꿀꿀한 7월을 그나마 행복하게 마무리해준 공연이었다. 내일은 에단 스티펠과 질리안 머피가 나오는 돈키호테다. 8월의 시작도 아주 행복하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