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춤출 것처럼 말하던 그녀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조만간 은퇴를 할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 유학 간 친구에게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 굉장히 잘 하고 예쁜 한국 누나가 하나 있다는 얘기로 (그때는 강수진이란 것도 몰랐음.) 처음 들었었다. 그 이후에는 언론을 통해 졸업 공연에서 주연을 맡았다는 얘기, 슈트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하고, 첫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을 들으며 놀랐던 게 어제 같은데 벌써 은퇴를 앞두고 있다니 진짜 세월 잘 간다. (이렇게 나도 또 늙는 걸 실감. ㅠ.ㅠ)
어제밤에 돌아와서 바로 썼어야 하는데 타이밍을 넘기니 귀찮아서 그냥 느낌만 생각나는대로 끄적끄적.
아직도 감상문을 안 쓰고 있는데, 작년 10월에 똑같은 크랑코 안무로 빈에서 빈 슈타츠오퍼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많은 부분에서 비교가 됐다.
일단 가장 극명하게 비교가 됐던 건 오케스트라. 나중에 2막과 3막에서는 좀 적응이 되어서 그나마 나았는데 1막 중후반부에서는 그 끝없는 금관의 불협화음에 미치는줄 알았다. 몇년 전 국립극장에서 러시아의 발레단이 했던 로미오와 줄리엣 때도 프라임이 반주를 맡아서 내 인생 최악의 로미오와 줄리엣 연주를 들려주던데, 그때보다는 눈곱만큼 나았지만 역시 소음 연발. -_-; 발레 반주에 코심이 올라오면 늘 불안에 떠는데 프라임이 반주를 맡으면 코심을 그리워하게 한다.
작년 빈에서 음악만으로도 행복했던 공연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최소한 음정이나 사운드 밸런스는 좀 맞춰서 오면 좋겠다. 지휘자가 슈트트가르트 음악감독이라서 그나마 기대를 했는데 연습 기간이 부족했는지 역부족이었는지 괴로웠음.
발레 얘기로 돌아가면, 아무래도 안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작년에 빈에서 공연을 볼 때도 느꼈던 건데, 그라마가 약하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볼 때 안무가 많이 낡았다.
크랑코가 동시대에서 경쟁하던 맥밀란이나 노이마이어, 혹은 그리가로비치만큼 살았다면 자신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계속 손질해서 좀 더 드라마틱하고 매끈하게 바꿔갔을 텐데 너무나 일찍,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바람에 그가 죽은 시점에서 정지되어 있다. 당시에는 참신하고 괜찮았을지 모르겠지만 먼지 폴폴 쌓인 구식 옷을 털어내서 계속 입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흑백의 명화 극장을 돌려보고 있는 느낌.
전체적인 흐름이나 설정은 어차피 비슷하지만 장면 전환이나 클라이막스에서 정제되지 못한 아이디어가 눈에 보이는 것 같다. 휘몰아치는 느낌도 부족하고. 그걸 제일 극명하게 느끼는 부분이 2막과 3막이다. 로렌스 신부 앞에서 결혼을 하는 장면과 티볼트의 죽음. 줄리엣 어머니의 등장과 퇴장까지 뭔가 좀... 그리고 3막에서 두사람의 죽음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장면도. 내가 본 로&줄 중에 로미오가 독약이 아니라 칼로 자살하는 유일한 안무이기도 한데, 깨어난 줄리엣이 로미오가 아닌 패리스 백작의 칼로 죽는 것도 좀 웃기다는 생각이 들고. 군더더기가 많다.
2막 마지막에서 티볼트가 죽고 난 뒤 크랑코 안무는 3막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첫날밤을 보내고 헤어지는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아무리 발레가 개연성에 관대하다지만 이건 쫌... 다른 안무가들의 안무에서 이 부분은 원수이자 남편인 로미오에 대한 치열한 사랑과 미움이 교차되고 둘이 갈등하고 어쩌고 괴로워하다가 화해한다. 그 치열함이 춤으로 표현되면서 관객들이 납득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냥 그래버리니 자꾸 몰입이 안 된다.
아무리 남편이라지만 하루 만난 남자가 사촌오빠를 죽였는데 그날로 바로 용서가 되냐??? 라는 생각을 하게 됨. 안무 자체만으로 놓고 봤을 때는 (크랑코 로&줄 갈라는 이 부분이 많음) 굉장히 아름다운 장면인데 연결해서 보니까 이렇게 또 딴지가 걸린다.
3막에서 패리스 백작의 죽음도. 그냥 깔끔하게 없애버리지 도대체 저 아저씨는 저기서 왜 죽어야 하는 거지??? 라는 의문을 갖다가 보니 그 아저씨 칼로 나중에 줄리엣이 자살을 함. -_-;;;; 그냥 로미오 칼로 자살을 하지 그 칼 하나때문에 불쌍하게 만들 필요가???
스토리 진행에서 이런 식으로 의문이 많이 떠올랐다.
다른 안무에서 굉장히 특색있게 묘사되는 티볼트와 머큐쇼도 좀 흐릿하고. 작년에 빈에서 크랑코의 안무를 보기 전까지 단편적으로 소개된 영상만으로 볼 때는 굉장히 기대가 컸는데 그때는 쫌 실망, 올해는 안무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커지는 듯.
크랑코가 평균 수명정도로만 살았다면 분명히 다 수정이 되었을 거라고 믿어의심치 않기에 더 안타까움. 왜 이렇게 확신을 하냐면 러시아 안에서만 굴러다니는 그리가로비치의 백조의 호수나 로&줄 초기 영상물을 통해 안무 변천사를 보면 비슷한 과정을 거쳐 수정을 하고 있기에. ^^
강수진을 보면서는 질투를 느꼈다.
어떻게 40대 중반으로 가고 있는 저 나이에 저렇게 가볍고 나풀나풀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니라 움직임 자체가 바로 춤인 경지에 올라가 있다. 꺼지기 직전의 불꽃이 가장 밝다고 하는 그 고리타분한 표현이 떠올랐다. 은퇴를 앞둔 발레리나의 거의 마지막 즈음의 그 광휘를 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하고 또 그 자연스러움이 부럽기도 하고.
이날 로미오는 필립 바란카비츠라는 폴란드 출신 발레리노인데 그야말로 전형적인 로미오. 안무 자체가 해석의 여지나 자율성을 크게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보니 뭐... 춤은 잘 추고 서포트 능력도 괜찮았음. 앞에서 계속 안무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긴 했지만 나름대로 크랑코 특유의 섬세함에 감탄을 했던 부분이 로미오 쪽에 있다.
1막에서는 로잘린데를 사랑한다고 쫓아다니면서도 할랑할랑~ 온 동네 처자들의 추파를 다 받아주고 온갖 한량짓을 하고 다니던 로미오가 줄리엣과 사랑에 빠지자 2막에서는 즐겁게 어울리던 아가씨들의 유혹을 다 거절하고 아주 조신하게 행동한다. 사랑에 빠졌다는 걸 그 작은 안무로 극명하게 보여주는 걸 보면서 감탄을 했었다.
물론 까칠하고 현실적인 나는 저게 실제 상황이고 둘이 탈없이 맺어졌다면 저 조신함이 석달이나 가겠냐, 길어야 일년이지라는 딴지를 걸고 있었지만. 사실 무덤까지 쫓아와 슬퍼하다 로미오에게 죽는 패리스 백작이 더 진중하고 믿을만하니 괜찮은 신랑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됨. 역시 부모님 말씀을 들어야... ㅋㅋ
공연이 공연이다보니 이번엔 예매가 치열해서 중앙 앞열이 다 나가서 사이드 앞열과 중앙 둘째줄을 놓고 고민하다가 중앙 둘째줄을 선택했는데 선택 미스. 세종문화회관의 층간 높이가 별로 높지 않은데다가 앞열에 앉은 여자들이 최홍만, 강호동, 남경주 급의 A급 재난은 아니었지만 앉은 키도 큰데다가 엄청 매너가 모자라는 B급 재난 수준이라 좀 많이 불편했음. 다음부터는 사이드더라도 무조건 제일 앞 열을 선택해야겠다.
이런저런 불만이 많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공연장은 LG와 예당이 그나마 나은 듯. 이제 내년에 있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 공연과 AMP의 카멘 예매 오픈을 기다려야겠군. 내년 봄은 LG에 열심히 출근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