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당에서 불나서 예정됐던 공연이 무산된 바람에 3년만에 겨우 다시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을 만났다. 예당에서 공연이 제대로 있었다면 아마 봤었을 안나 카레리나.
2006년에 브누아 드 라 당스 안무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글쎄. 김주원씨의 브누아 드 라 당스상 수상 만큼이나 좀 뜨아~한 느낌. 아마도 그 해에 안무상을 줄만한 적당한 작품이 없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면 이전에 이미 줬어야할 보리스 에이프만에 대한 뒤늦은 예우일 수도 있겠고.
보리스 에이프만이라는 이름을 지워놓고 그냥 이 안나 카레리나라를 작품 자체를 놓고 보면 괜찮다. 조금 더 매끄럽게 다듬으면 꽤나 괜찮은 수작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평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보리스 에이프만의 안무작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놓고 봤을 때는... 평작이다.
이건 그동안 입이 떡 벌어지는 수작과 결작들로 우리의 눈을 한껏 높여놓은 에이프만의 책임이자 업보일 수도 있겠다. 다른 안무가였다면, 훌륭해! 정말 괜찮군! 이라고 해줄 수도 있지만... 에이프만의 재능이나 그가 이전에 보여줬던 그 다양성과 역동성, 창의력 등과 비교해 평가할 때는 좀 쉽게쉽게 날로 먹은 느낌?
가장 큰 불만은, -그가 일부러 스타일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에이프만 특유의 처음부터 끝까지 숨 쉴 틈 하나 없이 몰아붙이는 그런 역동성과 빈틈없이 꽉 짜인 건축적인 구성미가 모자랐다. 에이프만의 발레를 보면서 비었다는 느낌을 받은 건 처음. 평이 별로 좋지 않았다던 Who's Who 를 봤을 때도 난 소품이나 동작 하나하나에까지 미친 그의 섬세한 디테일을 발견하면서 즐길 수 있었는데 이번 작품은 여백의 미가 아닌 빈틈이 있었다.
발레의 한계를 벗어나는 도전을 하는 에이프만보다는 클래식 발레의 토양 위에서 아주 곱게 변형을 추구하던 애쉬튼이나 튜더, 혹은 맥밀란의 향기도 느꼈다. 레드 지젤에서, 혹은 차이코프스키나 카라마조프, 러시안 햄릿에서 솔로 무용수들의 보여주던 그런 폭발적인 솔로 모놀로그나 2인무 3인무와 같은 안무가 매번 가능할 수는 없겠지만 이건 좀.... 고전 발레 안에서 너무나 많이 봤던 동작들이나 평범한 마임. 2막에서는 좀 더 나았지만 1막에서는 에이프만이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늙어가는 안무가가 그의 출발이었던 클래식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건가? 다른 의미가 있나? 등등 혼자 고민을 했었다.
두번째 불만은 클라이막스의 부재. 물론 2막 마지막에 안나의 자살로 이어지는 그 일련의 군무와 기차소리를 통해 쫙 끌어올리는 그런 느낌은 었지만 약했다. 그리고 강약완급을 조절하면서 리드미컬하게 최고조로 끌어올려 그 팽팽한 줄이 툭 끊어질 때 관객들의 심장이나 감정마저도 함께 저 아래까지 떨어뜨려 버리는 그런 극도의 긴장감이 없었다.
평범한 클라이막스와 예정대로의 결말이라고나 할까? 내가 에이프만 빠순이급이다 보니 그의 스타일에 익숙한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그 예상을 뛰어넘는 뭔가를 보여주거나, 감탄이나 생각할 여지를 줬는데 이번에는 전반적으로 너무나 빤했다.
마야 플리세츠카야의 안나 카레리나와 얼마나 다른지, 소설 스토리를 전형적으로 풀어내지만 플리세츠카야라는 발레리나의 카리스마에 기대어 평범한 안무를 극적으로 승화시켰던 그 작품과 다른 어떤 모습이 있을까. 그런 기대를 했는데 에이프만답지 않게 -아니면 이 영감님도 늙으시는지- 그답지 않게 전형적인 해석. 취향차가 있겠지만 나로서는 조금은 실망이었다.
군무들의 움직임은 다름없이 멋졌지만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지던 그런 독창성이나 스펙타클이 떨어지고... 음악도 좀 그저그런... 이번 작품은 전체적으로 에이프만 특유의 무용수들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그런 극도의 긴장감, 스피드가 전부 한박자가 줄어 있었다.
미국 순회 공연에서 별로 평이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왜 그랬는지 이번에는 이해할 것 같고, 별로라는 평을 한 비평가들에게 나도 동감을 하고 싶다.
아주 길게 안나 카레리나에 대해 혹평을 퍼부운 것 같은데, 위의 불평불만은 에이프만이라는 안무가의 작품 평균을 기준점으로 잡아서 나온 거였고, 그냥 일반적인 모든 발레 공연들을 놓고 봤을 때는 만족스러운 공연. ^^
아마 이 작품이 에이프만의 발레와 첫 만남이거나, 아니면 첫 발레 관람을 온 관객이라면 내가 차이코프스키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항 강도의 충격과 만족감을 충분히 느꼈을 거라고 믿는다.
아마 전세계 발레단 중에서 무용수들의 평균키가 제일 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하나같이 쭉쭉빵빵인 남녀 무용수들.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을 시켰는지 군무를 보면 늘 감탄이 나온다. 끝없이 이어지는 장면과 군무 교차에 보는 사람이 숨이 찰 정도였는데 이번 작품은 무용수들에게는 좀 널널하니, 쉬어가는 페이지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상당히 여유가 있는 모습들.
공연 캐스팅이 공지되지 않아서 -내가 못 봤을 수도 있음- 대충 어림짐작을 해보자면, 안나 카레리나는 니나 즈미에베츠, 카레닌은 세리히 볼로부이에프, 브론스키는 올렉 가비셰프, 키티는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의 딸인 최리나인 것 같다.
네명 다 춤은 나무랄데 없이, 표정이며 연기 등등 만족스러웠다. 다만 몰입도에 있어서는 이전 주연들에 비해서는 역시 아직은 좀. 예전 프린시펄들은 살짝살짝 호흡이 안 맞거나 실수를 해도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카리스마며 무대 장악력이 엄청났는데 이번 공연은 삐그덕하는 미세한 실수들이 내 눈에 잡혔다. ^^; 다들 좋은 무용수들이니 충분히 시간과 경험을 통해 해결해나갈 거라고 믿음.
어쩌고 저쩌고 투덜투덜 사설이 길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최리나는 대충 봐도 170대 후반이던데 다른 발레단에 갔다면 파트너를 찾기 힘든 장신. 에이프만을 택한 건 현명한 선택인 듯. 유니버설 발레단의 이상은씨를 보면 파트너가 없어 늘 안타깝던데 그녀도 좀 잘 풀리면 좋겠다.
에이프만 발레단으로 돌아온 알렉세이 투르코를 보면서 인간지사는 정말 모른다는 걸 실감. 키로프로 옮기겠다고 나갔던 투르코는 다시 에이프만으로 돌아갔는데 정작 에이프만 발레단에서 탱자탱자하던 유리 스메칼로프는 키로프로 갔다니 원. -_-; 스메칼로프가 춤추는 브론스키를 기대했었는데. 그리고 그의 뜨레노닌도. 예당에 불이 나지 않았다면 갈매기도 볼 수 있었는데. ;ㅁ; 뭐...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리만 브라더스가 환율 난리만 안 냈어도 에이프만 발레단의 갈라 공연도 볼 수 있었다. 환율이 너무 올라 답이 안나와서 그건 취소했다고 함. ㅠ.ㅠ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을 할 때 무대 한가운데에서 에이프만이 짠~하고 등장하셨는데 관객의 환호도 제일 컸지만 그의 표정 역시 '내가 진정한 주인공이야~'라는 포스가 가득했다. 그건 인정함. 예전에는 수염이랑 머리카락에 붉은 갈색기가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는 하얗게 센걸 보면서 에이프만 발레단의 첫 내한공연 이후 세월이 꽤나 많이 흘렀구나를 실감.
프로이트를 주제로 발레를 구상하고 있다는데 이전 작품을 뛰어넘는 걸작이 나오면 좋겠다. 이 영감님의 성적 취향은 잘 모르겠지만 여자가 주인공인 발레보다는 남자가 주인공인 발레를 더 멋지게 잘 만드는 건 현재까지 100% 확률이니 그 징크스가 입증되면 좋겠다.
그나저나 가을에 국립발레단에서 에이프만 안무의 차이코프스키를 공연한다고 하던데 객원 쓰지않고 자체적으로 더블 캐스팅이 가능할지 솔직히 의문. 그 무시무시한 작품을 소화하려면 주연들도 주연들이짐나 군무진이 고생 엄청 하겠다는 생각도 들고. 최근 몇년간 매너리즘에 빠진 국립발레단 프린시펄들의 면면을 볼 때 별반 기대는 안 되지만 궁금하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