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감은 벼락치기로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벼락치기하던 습관이 지독하게 달라붙어서 방해를 한다. 마음을 가다듬는 의미에서 쬐끔은 영양가 있는 포스팅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에 또 하나 올린다.
근데 이 조경란 작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 할 얘기가 없다. ^^ 모범적이기는 하나 세상의 이면을 꿰뚫는 것 같은 그런 날카로움이나 특별한 깊이나 매력은 없는... 개인적인 느낌이니 테클은 사양~
독일어권에 일찍 소개되어 그쪽에서 지명도가 높다는 이유로 선정된 작가.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가 인정을 하니 방송을 준비하는 동안만이라도 좋아하기로 했다.
별 관계없는 얘기지만 참 예쁘다. ^^
1930-40년대 문인들 사진을 보면 지금 내놔도 손색없을 미남들이 많던데 90년대 이후는 미인 작가들의 행진인 것 같다.
하나같이 어쩌면 그렇게 예쁘고 분위기가 있는지.
2009. 위에서도 썼듯이 내 타입은 아님. 이때 젊은 작가들을 많이 했는데..... 공지영이나 신경숙, 은희경씨 쪽이 내게는 더 매력이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서정이나 심리보다는 서사가 더 체질에 맞는 모양이다.
0047 90년대 이후 문학이 인문학적 깊이를 잃었다는 지적에 대해서.
0101 제가 만약에, 저는 1990년대 이후 등단을 해서 지금까지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제가 그 질문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라고 답변을 한다면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일거에요
0117 그러나 한편으로 왜 그런 지적을 받았나 생각해보면 혹시 이런 건 아닐까요?
0124 예를 들면, 어떤 기존의 전통적인 소설속의 인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끝없이 질문하고 부정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었죠.
0144 그에 비해 90년대 이후의 소설들은 세계, 소설 속의 많은 인물들은 세계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많았죠. 그리고 그들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나, 자아인것처럼 보였잖아요.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해서 무관심한것 처럼 보이기도 했고, 이러한 인물들 때문에 그런 인문한적 깊이를 잃었다, 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은 해보지만, 그러나 제 입장에선 하이데거의 논거에 의하면, 나라는 것은 곧 존재이고 그 존재는 곧 세계를 대변하기도 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문제는 한번 더 짚어봐야할 필요가 있고, 인문학적인 깊이를 잃었다는 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0330 조경란의 작품이 다른 여성작가와 다른 점
0339 그런 질문을 사실 여러번 받았고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많은 이를테면 평론가분들이 독자분들이 제 작품을 이야기하실 때 일단 첫 번째로 잘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이라기보다는 어떤 철학서에 가까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예를 들면 국자 이야기나 이런 작품, 그리고 전통적인 소설의 방식에 의존하고 있지만, 기대고 있지만, 장면이 전환이 빠르고 이미지가 많고 생략을 하는 점에서는 새로운 발상의 기법, 새로운 장면의 기법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새롭다, 그렇다고 다른 어떤, 일부의 어떤 분들처럼 서정적인 문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0446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는 그것만으로도 한 작가의 작품 세계나, 그리고 그가 다른 작가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기준을 마련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작품이 다른 여성 작가분들의 작품과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제가 썼기 때문이죠. 조경란이 쓴 작품이니까, 그리고 제가 생각할 때, 그래서 다르고, 다른 모든 여성작가들의 소설도 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른 점, 그것이 한 예술가의 가장 큰 특징이며 가장 갖기 어려운 장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예술가, 혹은 작가에게 있어서 다르다, 같은 형용사 혹은 동사 같은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면 예술가로서 다시한번 자신에 대해서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 여기에는 다른 분야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공감. 여하튼... 말은 참 예쁘고 조근조근 잘 하는데 문제는 알맹이가 없다. 이때까지 하늘이 노랬음. 취재작가 ㅇ씨는 작가 인터뷰 나가서 졸려본 것은 처음이었다고 함. 아무래도 작가와 작품은 닮는 모양이다.
정확하게는 다른 여성작가분들과 제가 어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0601 질문 : 그런 차별성이 90년대 이후에 더 중요해졌나.
0610 예 많이 중요해졌죠. 왜냐하면 90년대 이후에 수많은 여성작가분들이 등장하고, 지금까지 활동해오고 있기도 하고, 여성작가 뿐만 아니라 그때 아주 많은 작가군이 형성됐고 등장했죠, 그리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데 그들이 지금까지 평단의 지지를 얻고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가진 예전에 없었던 다양성과 다양한 목소리와 다양한 개성, 그리고 동시대 분들과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주제에 접근해서 그러한 작품을 써왔기 땜누에 독자들도 많이 갖고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0700 그리고 90년대 문학.. 제가 생각하기에 90년대 문학의 가장 큰 특징. 저를 포함해서 젊은 작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그들의 고요한 목소리, 개성, 다양성, 그것이 가장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사실 가장 빤한 얘기긴 하지만 필요한 멘트였다. 앞서 인터뷰한 작가들은 내가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고 새로운 맥을 찾아주는데 반해 조경란씨의 경우는 못 알아듣거나 쓰지 못할 내용들 대부분에 가끔 이렇게 잘라 쓰기 좋은 교과서적 멘트 한번 날려주는 정도. 그래도 이 정도가 어디냐. 감사했음.
2009. 바닥까지 내려가보면서 가장 치열하게, 그리고 희망도 없이 세상의 부조리, 압박과 싸웠던 시기에서 살짝 벗어난 덕분에 개인을 생각할 여유 안에서 성장한 우리 세대의 한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살벌할 정도의 예리함이나 무쇠 같은 단단함은 결국 기나긴 시련을 통해서 단련되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를 포함해서 우리 세대나 386은 강철은 아니다. 근데 왜 타락은 강철이었던 그 세대만큼이나 심하게 하는 걸까? 암담......
0726 질문 / 독일에서 좋은 반응을 얻게 된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0835 일단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스스로도 기쁘고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 번째 이유는 그런게 아닐까요.
0854 사실 사년전에 독일에 처음 가서, 작품을 처음 낭독하고 그 때 처음으로 청중들을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전에, 이미 작품이 훨씬 이전에 번역이 되었고, 그리고 그 작품을 통해서 여러번의 낭독회를 통해서 독일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예전부터 있었어요.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제가 3월에 라이프찌히 낭독회에 가서 낭독을 했는데, 어떤 독일 독자분이 싸인을 받으면서 하시는 말이 내가 사년전에 슈투트가르트 낭독회에서 당신을 봤다, 그리고 당신이 여기 다시 낭독회를 하러온다고 해서, 지나가는 길에 다시 이 낭동회를 듣기 위해서 지나가는 길에 일부러 들렀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분은, 그분 뿐만이 아니라 여러 번 저를 보았다는 독일 독자들을 만났거든요. 이미 그 이전에 작품이 번역이 되어서 독일 독자들을 만날 기회가 저한테 있었다는 것이 저한테 가장 큰 이유일 것 같고, 두 번째는 글쎄, 이런 말씀이 어떻게 이해가 될지 모르겠으나 독일에 소개가 되는 가장 젊은, 혹은 가장 신세대의 소설이 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032 그래서 독일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 기자분들이 깜짝 놀랐어요. 당신 말고도 더 젊은 작가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냐, 이런 질문을 받았거든요.
--> 유럽쪽에서 시는 거의 완전히 죽었고 소설도 젊은 작가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한국처럼 이렇게 젊은 작가들이 줄줄이 등장해 글을 쏟아내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는데... 제3세계권에서 한국이 좀 살고 행세를 해서 드러날 뿐이지 아프리카나 다른 아시아권도 충분히 역동적이지 않을까?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제3세계 문학을 배울 때 인도와 베트남, 아프리카 문학에서 느꼈던 엄청난 에너지는 분명 살아 있으리라 본다. 어쨌든... 한국의 순수문학에 아직은 자원이 많다는 것에는 동감.
원론에서 벗어나는 얘기지만... 우리 취재작가 ㅇ씨를 비롯해 이 방송 바닥에서 문창과, 국문과 등등을 나온 사람들 치고 나중에 소설 한편 쓰지 않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못 봤음. 방송은 생계이고 언젠가는 순수 소설을 써야한다는 숙제를 다들 등에 지고 있다. 비문창과 계열인 나로서는 이해가 조금 힘듦. 난 철저하게 글=돈이다. 돈이 안되는 글은 쓰지 않는다. 내가 음악을 할 때도 보수가 없는 연주는 봉사활동을 제외하고는 절대 하지 않았다. 매정하고 속물이다 욕할지 몰라도 최소한 내 바닥에서 프로라는 자부심만은 있음.
그리고 그 이외에는 사실 코끼리를... 제 책이 이제 2권 번역 되어 있는데요. 코끼리를 찾아서는 일종의 저의 자전적인 소설이기도 하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한 개인의 내면적인 이야기가 국경을 넘어서 언어를 초월해서 다른 나라의 독자들에게 가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가서 닿을 수 있을까 이런 우려를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많은 분들이 아,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독과 소외와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어떤 대면성, 이런 것들은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생각해보면 한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이 어떤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어서 그들에게 어떤 공감을 만들어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이 이유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는데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번역 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좋은 번역자를 만나서 그 분들이 번역에 아무 어려움 없이 작품을 대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가장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가지 사족을 붙이기 위해서는 한국 문학이 외국에 소개되기 위해서는 아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좋은 번역자를 양성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52 질문 / 시대의 어떤 특징을 작품에 담고 있나.
1308 저는 늘 언제나 그래왔던 것은 아니지만 이 거대한 도시, 이 메트로폴리스에서 살아가는 할ㄴ 개인의 고독과 상처와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상처라는 것은, 사실 사람들은 인간은 강해보이지만 때로 약하기도 하짆아요. 그리고 늘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지만 우리는 사실 단절되어 있을 때가 많죠. 그 단절을 넘어서 어떻게 한 인간과 한 인간을 소통시켜 줄 수 있을 것인가 만나게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문제에 있어서 천착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분주하고 늘 쫓기듯이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가만히 한 개인을 응시해보면 그가 고독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고독한 분들께서 제 소설에 대한 공감을 가지시고 읽어봐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소외라는 것,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상황들을 저는 결코 부정적인 측면으로 그리고 있지 않거든요.. 제 소설을 두 번쯤 읽어보시면 그것이 결코 소외나 단절이나 고통이나 불안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우리가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지만 그것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되는 독자분들께서 제 소설을 읽어주시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 그런가? 작가가 해주는 자기 작품 분석이라.... 코끼리부터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2009. 솔직히 난해하고 재미없었다. ^^; 쏘리......
1525 자전적 요소를 소설에 담는 이유
1541 글쎄 어떤 작가들은 글을 쓸 때, 당신은 어떻게 글의 소재를 구합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살만 루시디가 그런 말을 했어요. 나에게는 수도꼭지 두 개가 있는데 수도꼭지를 탁 틀면 물이 좌르륵 쏟아지는 것처럼 언제나 이야기가 쏟아진다. 이런 글을 어디선가 읽고 한참 웃은 적이 있는데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죠. 저는 작가이지만 언제나 그렇게 쓸 이야기가 항상 있는 건 아니에요. 어떤 이야기들이 제 안에서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가 가장 절실하고 가장 하기 힘든 이야기가 툭하고 튀어나오거든요. 그리고 작가에게는 환경이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저는 봉천동에서 태어나서 35년이 넘도록 봉천동에서 살고 있으므로 봉천동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착각도 하고요, 그 봉천동에 대해서 한번쯤 써보는 것, 그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 또한 작가로서의 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1700 그리고 옥탑방이라는 것은 어떤 분이 제 옥탑방이 와보셔서 그래요.. 너무 좁은 공간에서 오래 같여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 당신의 사고, 상상력 또한 좁고 협소해지지 않을까 걱정해주셨는데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봉천동, 옥탑방에서 살고 있지만 그러나 일년에 최소한 두 달 쯤은 거기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행을 가거나 다른 일이 있어서 다른 곳에 가 있죠. 한 사람이 자신의 집에 너무 오래 있다보면 자신의 집의 외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멀리 나가서 나,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외관이 어떤가 한번쯤 투시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협소한 공간이 저로 하여금 사고와 상상력을 제한한다 그런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자주 쓴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고, 독일이나 미국 쪽에서 낭독했던 소설들이 자전적인 요소가 강했기 때문이에요.
1827 그리고 자전적인 소설을 쓰지만 그것이 결코 저의 이야기가, 소설은 이야기를 하는 것, 이지만, 소설은 작가의 이야기, 작가의 고백을 기록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은 나의 눈으로, 나의 안경을 쓰고 그것으로 세계를 투시하는 행위이기도 하거든요.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봉천동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봉천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서울에 살 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11 그러나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어떤 소설을 썼을 때 저는 이러한 바람을 가지고 썼지만, 이것이 한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소설이라는 것은 세상에 툭하고 던져졌을 때 그것이 스스로 어떠한 역경이나 비평이나 독후감을 견뎌낼 수 있는 어떤 자생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맞는 말. 그런데 이렇게 이론으론 알지만 역시 실제론 견디기가 쉽지 않다. 얼마쯤 내공을 쌓아야 할까?
그래서 저는 제가 제 자전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툭 던져졌을 때, 열 분이 읽었을 때 열 분이 각기 다른 해설을 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을 느끼실 수 있다면 그 작품에 대한 의미가 더 깊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2005 1987년부터 2005년까지를 정의한다면.
2033 단절과 결핍과 모더니즘과, 정체성과 다양성.
2100 단절과 결핍과 모더니즘과 다양성, 그리고 정체성
-->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 모범 답안을 그대로. 아마도 같은 시대에서 같은 사건과 문화를 접하며 비슷한 시간을 살아온 인간끼리의 한계겠지. 그래도... 깊이있게 파고드는,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작가라면 내가 생각지 못한 대답이 나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아주 조금은 느낌.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아주 조금이고 내 구성안에 꼭 필요한 대답을 해줘서 기쁘다. ^^ 너무나 파격적인 소리를 하면 구성안을 왕창 뒤집어야 하는데 그러면 대략 난감해지는 고로. ^^
90년대 이후 작가들의 작품은 솔직히 작년과 올해 한국문학 STARLIT을 하지 않았으면 절대 안읽었을 것이다. 이건 솔직히 인정. 그러나 억지로 머리에 쑤셔넣으면서 나름 감탄도 하고 있긴 하다. 80년대 이전까지 작가들이 보여주던 그 거대한 스펙타클은 없지만 세밀화나 점묘화를 보는 듯한 느낌 역시 새롭고... 또 그 가치도 인정하니까. 그러나 내 취향은 역시 거대한 80년대 이전의 대하물과 가벼운 재미를 즐길 수 있는 장르문학이라는 것은 재확인.
이제는 우리 PD와 문창과 출신 ㅇ씨도 휙휙 나르는 중국 무협 시리즈와 007 시리즈를 좋아하는 나를 포기하고 인정해주는듯. ㅋㅋ 역시 지속적인 세뇌의 효과는 크다.
2009. 방송에 관계된 것 말고는 여전히 한국 문학은 안 읽고 있다. 따져보면 고전이라고 이름 붙은 무게감있는 독서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원 때 제일 많이 헀던 것 같다. 지금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토지 읽으라고 던져주면 체력이 안 따라줘서도 못 읽을 듯. 두꺼운 로망 롤랑이며 발자크, 토마스 만의 소설 같은 걸 도대체 고딩이 어떻게 읽었는지... 아침 8시까지 학교 가려면 6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는데 그런데도 12시 넘어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어댔다. 과거의 나를 떠올려보면 내가 봐도 불가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