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애정을 많이 갖고 있던 단체였고 한 때는 캐스팅별로 공연을 모조리 찾아보던 열정도 발휘했었는데 실망이 계속 쌓이다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좀 포기의 단계에 들어가서 공연을 하거나 말거나~의 상황이었다. 아마 이번 공연이 보리스 에이프만의 차이코프스키였다고 해도 말라코프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패스했을 텐데 말라코프를 무대에서 친견할 수 있다는 데는 도저히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음.
등에 잔뜩 짊어진 쌀자루를 내려놓기 위해 금요일에 스포츠 마사지를 받은 뒤라 토요일에는 쌀자루가 사라진 후유증으로 몸살처럼 온 몸이 쑤시고 아픈 상태라 컨디션 최악. 아마 말라코프가 아니었으면 그냥 돈 버렸다 생각하고 집에서 뻗어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일본은 수차례 방문하시면서 한국에는 좀처럼 들러주지 않는 이 어려운 오라버님을 뵈올 기회를 도저히 놓칠 수가 없어서 비실비실 뛰어나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 갔으면 정말 후회했을 거야~ 나이가 42살인가 43살로 알고 있는데 나이를 속일 수 없는지 한창 때 보여주던 그 폭발적인 에너지나 눈이 휙휙 돌아가는 테크닉은 없지만 클라스는 영원하다는 명언이 진리임을 증명해주는 무대였다.
등장한 시점부터 시선을 확 잡아끄는 그 강렬한 존재감은 한 시대의 스타로서 당연하고 기본적인 거니 차치하고 내가 내내 감탄했던 건 그 강한 선과 스케일을 받쳐주는 아주 세세하고 섬세한 디테일이었다. 그냥 긴장을 풀고 지나가도 되는 아주 소소한 장면에서도 발끝과 손끝까지 절대 끈을 늦추지 않고 완벽한 디테일을 잡고 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의 포인이 어쩌면 그렇게 예쁠 수가 있는지. 차이코프스키가 누워있는 장면에서 완벽한 선을 그리는 그의 발끝을 보면서 정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조금 놀랐던 건 말라코프의 키가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영상물에서 봤을 때는 엄청나게 큰 키까지는 아니어도 엄청 훤칠하게 봤는데 비율이 워낙 좋고 또 존재감이 압도적이다보니 크게 보였지 실제로는 180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유리 스메칼로프와 나란히 섰을 때 작게 느껴지던 알렉세이 투르코보다 작았으니까. 역시 사람은 짝을 잘 만나야 하는데 투르코가 이렇게 크게 느껴지기도 참 오랜만이었다. ㅎㅎ 스메칼로프가 진짜 크기는 큰 모양.
내가 본 차이코프스키 공연의 순위를 매기자면 역시 국내 초연이었던, 보리스 에이프만의 대표적인 무용수였고 다시 찾아보기 힘든 상성이었던 마르코프와 아나얀의 조합이 1위이고 이번 공연은 2위. 말라코프도 투르코도 각기 떼어놓고 보면 둘 다 좋은 무용수지만 서로 그 느낌이 굉장히 다르다. 닮은 듯 하면서도 또 다른, 애증이 교차하는 차이코프스키와 그 분신은 기본적으로 그 색깔이랄까 재료가 같아야 한다는 걸 첫 공연의 저 두 무용수가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에 이후 공연은 자꾸 그런 비교를 하게 된다.
이미 불가능한 조합이지만 국내 무용수를 놓고 캐스팅을 한다면 김용과 김창기가 차이코프스키와 분신을 하면 극도의 상성을 이룰 것 같다는 상상을 혼자. 이원국은... 음.... 박재홍?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군.
어쨌든 차이코프스키는 젊은 무용수보다는 어느 정도 연륜이 있는 최소한 30대 중반 이상의 무용수가 춤추는 게 제격이라는 생각을 했음. 그리고 청년/왕자/조커를 춤춘 국립 발레단의 무용수. 기럭지가 짧아 좀 슬프기는 했지만 몸매도 좋고 상당히 탄탄하고 좋은 춤을 추더라. 그 자리에 이원철씨가 있었다면 진짜 적격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원철씨가 캐스팅에도 없고 단원 이름에도 빠져 있었다. 다른 발레단으로 옮겨 갔나?
각설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에이프만이 안무한 작품들을 놓고 얘기할 때 보통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건 '레드 지젤' 평론가며 소위 발레 매니아 층이 걸작으로 평가하는 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인데 나는 보리스 에이프만의 대표작으로 두고두고 세기를 남아 회자될 작품은 '차이코프스키'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스피디하고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일반 관객들에게도 꽤나 쉽게 다가가는데다가 이건 발레 팬들에게는 차이코프스키와 프티파를 엄청 사랑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에이프만이 심어놓은 발레사의 다양한 작품과 요소들, 상징 코드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하고 프티파가 안무한, 작곡가의 살아 생전에는 실패작으로 기록된,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호두까지 인형이며 포킨느가 안무하고 니진스키가 춤췄던 페트루슈카의 차용까지. 안무가의 그 무한한 애정과 적절하고 세련되게 표현된 오마쥬는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고 또 발레팬으로서 행복하다.
간만에 오케스트라가 신경을 크게 거슬리게 하지 않아서 고마워서 봤더니 경기 필하모니였음. 코심 말고 여기를 계속 좀 애용해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을 갖게 된다.
말라코프를 비롯한 주연 무용수들이 충분한 만족을 주어서 분노 폭발까지는 안 갔지만 버벅거리던 군무들에겐 한 마디 해주고 싶음.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죽죽 뻗은 에이프만 발레단 무용수들의 그 훤칠함이야 DNA의 문제라고 용서할 수 있지만 명색이 프로 발레단이면서 기본적인 호흡도 못 맞추는 게 말이 되냐고. 특히 중간중간 흐름을 깨는 특히 우산 갖고 춤추던 그 군무들! 첫날 공연도 아니고 거의 막공인데 아직도 버벅거리면 도대체 어쩌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