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방송된 생명공학 관련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면서 자료로 구입했던 책이다. 대충 보니까 내가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라서 접어두고 일에 필요한 책들만 열심히 달리다가 한숨 돌리는 시점에 읽으려고 잡았다.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은 DNA나 유전자 관련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자아내고, 책의 카피는 태고의 유전자를 파헤치려는 과학자들의 노력과 상업적인 이유로 그걸 집요하게 방해하는 다국적 종자 회사들의 대결을 연상하게 한다.
구입했을 때는 앞쪽을 기대했고, 12월에 읽을 때는 뒤쪽을 기대했는데 다빈치 코드 류의 음모와 대결은 아니고 잔잔하게 팩트를 전달하고 있다.
1987년에 다국적 제약회사인 치바 그룹의 연구소에 근무하는 구이도 에프너 박사와 하인츠 쉬르히 박사가 자기장을 이용해 암염 속에 남아 있던 태고의 박테리아를 되살리는데 성공하고, 또 자기장 실험을 통해 지금은 멸종된 형태의 식물들을 만들어낸다.
이 연구는 옥수수, 밀과 같은 식량 자원과 송어 등 물고기 양식에도 응용하는 실험이 이어지고 태고의 형태를 복원하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는다. 태고의 것일 수도 있는 이 식물들은 병충해에는 강하면서 성장 기간은 짧고 수확량은 몇 배나 되는, 지구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형태. 물고기 역시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당시 과학계의 이론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파격적인 실험 결과들은 수차례 엄격한 검증을 거쳤음에도 주류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치바 그룹은 이 프로젝트를 중단한다.
프로젝트가 중단된 이유를 이 책에서는 다국적 종자 회사들이 종자 독점을 통해 농부들을 예속시키고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본다.
과거 농업의 형태는 씨앗을 뿌려 수확을 얻으면 농부는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씨앗을 골라 종자로 남겨 놓고 다시 다음해 농사를 짓는 일의 반복이다. 하지만 선진국 농부들의 대부분과 상당수 국가들의 농업은 2대에 내려가면 우수성을 잃도록 유전적으로 디자인 된 종자회사의 씨앗을 사서 농사를 짓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씨앗을 남겨 뒀다 심을 경우 종자 회사들에게 막대한 손해배상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지적재산권이라는 이름으로 종자 회사들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법 체계 아래에서 농업 자체가 그 회사들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전기장은 간단한 처리만으로 종자 회사들의 유전자적 조작을 벗어나는 뛰어난 결과를 도출한다. 소규모 자영농들에게 독립과 이익을 보장할 수도 있다는 희망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치바 그룹이 연구를 접을 때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다국적 종자회사들 입장에서는 분명 원하지 않는 연구일 것이다.
그렇게 묻혀졌던 연구를 구이도 애프너의 두 아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과학자의 길을 걷는 다니엘과 예술가이면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사회 운동가인 니쿤야가 이어 받고 있다. 다니엘은 중단되었던 연구를 조심스럽게 진행해서, 전기장 처리를 통해 유전자적인 또 다른 재앙이 나타나지 않는지 검증하고 실험 내용을 업그레이드시키고 있고 니쿤야는 그 결과물을 가장 필요한 곳에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부패한 정권이 밑빠진 독에 물을 붓듯 원조를 빨아들이는 아프리카의 한 국가에서 전기장을 통한 농업혁명을 준비하고 있다는 상황에서 책은 끝은 맺는다.
카테고리는 과학에 있고 실제로 과학 관련 내용이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은 굉장히 시사적이고 세계화의 문제, 부패한 정치 구조, 가난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제 3 세계와 먹고 살만한 국가에 살고 있더라도 다국적 기업의 지배 구조 아래 예속되는 자영농들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하게 한다.
2007년에 나온 책이니 이미 그 농업실험이 시작됐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또 전기장의 도움으로 성장기간이 빨라져 병충해의 피해를 받지 않는 식물이 대규모로 재배된다고 해서 최빈곤 국가의 식량문제가 획기적으로 해결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이란 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적응력이 빠르다. 그런 식물들이 자리를 잡는 순간 그 식물들을 먹어야 사는 벌레들은 식물의 라이프 사이클에 맞춰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진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전투가 시작이 되겠지. 하지만 이건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소수의 종자회사의 도움없이 농사를 짓기 위한 씨앗을 구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세상은 재앙이라고 생각한다.
전원주택에 흥미를 가지면서 그 관련 카페를 많이 다니다보니 자연농, 유기농을 하는 귀농인들의 글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일찌감치 깨어난 일부 귀농인들은 이런 예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토종 종자를 구해서 농사를 짓고 그 씨앗을 다시 받는 귀찮은 작업을 하고 있다. 번듯하고 모양 좋은 농산물에 익숙해진 도시 소비자들에게 토종은 당장은 별반 상업성이 없어 보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분명 가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있긴 하지만 한국은 그래도 최악의 빈곤의 고리는 끊고 올라왔으니 이런 시도가 가능하겠지만 아프리카나 동남아 일부 지역에서 당장 굶어죽게 생긴 사람들이 보면 신선 놀음으로 보일 수 있는 농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기장은 대다수 농부들이 소수 기업의 지배에서 벗어나 종의 다양화, 자연스러운 도태와 진화라는 자연의 연결고리를 지켜가면서 농업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고리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기대를 조심스럽게 해봤다.
책의 제일 마지막 쪽에 전기장의 효과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달라는 호소문이 있는데... 꼭 그 호소문 때문은 아니더라도 이 책은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고고한 상아탑의 학문과 우리가 사는 사회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한 덩어리라는 걸 느끼게 된다.
책/과학
태고의 유전자
뤽 뷔르긴 | 도솔 | 2009.12.1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