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이고르 젤렌스키 한명 때문에 경기도 광주도 아니고 전라도 광주까지 갔다오는 기염을 토한 공연.
완전 꽝이었다면 길에다 버린 시간이 아까워서 (돈은 사실 서울서 봤으면 차비와 공연비를 포함해서 더 들었거나 아니면 아주 후진 자리에서 봤을 게 뻔하기 때문에) 펄펄펄 뛰다 못해 뒤로 넘어갔을 테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에도 만족감이 남아 있다.
괜히 동행 만들고 하느라 기운 빼지 않고 혼자 조용히 내려갔다고 즐겁게 공연보고 올라온 나의 안목을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음. ^^
각오했던 대로 관객들의 수준은 열악했지만 에어컨 안 틀어주는 것 빼고 공연장 시설이나 또 출연자들의 수준이 그걸 상쇄시킬 정도였기 때문에 투덜거리진 않겠다. 촌 -이건 비하가 아니라 광주 출신인 PD가 자기 고향을 얘기할 때 항상 촌이라고 해서 나도 입에 붙었음. ^^- 에 있는 공연장이라고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나 할까. 회의장을 만들어 놓은 성남 아트센터 관계자들에게 광주 문화예술회관의 객석 구조를 한번 보고 오라고 권해주고 싶을 정도로 좌석간 높이나 간격이 정말 이상적이었다.
사설은 그만하고 공연 감상 기록만 간단히.
1부 공연 시작은 마리나 리즈키나와 안드레이 파데예프의 잠공주 3막 결혼식 파드데.
[#M_ more.. | less.. |볼쇼이나 키로프 무용수들의 공연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맞추냐 늘 감탄했는데 이번엔 그런 감탄사는 전혀 내지를 수 없었다. 나중에 프로그램을 확인해 보니까 한명은 키로프, 한명은 볼쇼이에 있는 무용수들이다. 두 발레단의 스타일도 많이 다르고 또 함께 춤추던 사람들이 아니니 그런 깜짝 놀랄 정도의 파트너쉽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겠지.
투덜거림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눈에 거슬릴 정도로 삐걱거린 건 아니었다. 다만 기대치에 못 미쳤다는 것만큼은 본인들도 인정해줘야 할듯.
둘 다 아카데믹 발레의 전형을 보여주는 잠공주 답게 깔끔하고 좋은 춤을 보여주긴 했지만 최상의 것을 보여주겠다는 아우라는 없었다.
동작 하나하나는 정말 발레 교본같았지만 보는 사람을 확 잡아끄는 매력은 없었던 무대. '너희는 이 정도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지?' 하는 정도의 느낌이라 별로 기분이 좋진 않았다. 한국 발레팬들은 그 정도에 이젠 만족하지 않거든!!! 순간에 승부하는 갈라의 맛을 여기서도 좀 느끼게 해달라고!
UBC 엄재용과 황혜민의 심청. 2막이던가 3막의 달밤의 2인무.
심청에서 가장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고 나도 이 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UBC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발레고 워낙에 많이 공연을 하다보니 호흡이 딱딱 맞는다. 전막 공연이라면 별로 색깔이 맞지 않는 엄+황의 언밸런스가 느껴졌겠지만 갈라에선 거슬리지 않았음.
괜찮았다.
안나 안토니체바와 블라디미르 네포로지니의 스파르타쿠스. 3막인가... 결전을 앞두고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춤추는 부분이다.
안나 안토니체바의 프리기아는 작년에 봤지만 작년에 크라수스를 춤췄던 네포로지니가 어떤 스파르타쿠스를 보여줄지 내심 궁금했는데 멋지긴 했다.
둘 다 참 능숙하게 스파르타쿠스를 연기하고 잘 춤춘다. 전막 공연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살짝. 국립 발레단에서 일부 무용수들이 같은 장면을 춤출 때마다 느끼는 조마조마함 없이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는 것도 좋았음.
그러나 이때쯤 인내심 게이지가 바닥에 도달한 주변 어린이들의 난동이 시작. 도저히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들썩거리니 도대체 감동에 빠져들 수가 있다. 그래도 용서할 수 있었던 건 좌석 층간 높이가 충분해 애들이 어지간히 들썩여도 시야에 치명적인 장애는 주지 않는다. 그리고 뭘 하건 내 새끼가 옳아~ 하는 서울 어머니들과 달리 촌(^^) 어머니들은 최소한 애들을 자제시키려는 노력이 보였기에 정상 참작.
이 글을 어머니들이 볼 확률은 적겠지만 그래도 투덜 한 마디. 당신에게나 뭘 하던 예쁘고 잘난 내 자식이지만 남들에게는 몬스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제발 좀 명심해 주시길. 최소한 민폐는 끼치지 않는 애들을 길러내야지 도대체 개념을 달고 나왔는지 의심되는 젊은 엄마들이 너무 많다. -_-;;;
국립 발레단 김주원, 이원철 커플의 차이코프스키 파드데.
이런 갈라 공연에 아주 단골 레퍼토리로 써먹고 있는 작품인데... 2년 전부터 김주원씨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지만 이번 공연을 보면서는 솔직히 참담했다.
덕지덕지 화장을 해서 주름을 감춘 늙은 쇼걸을 보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엄청난 크림과 데코레이션으로 형편없는 빵맛을 감춘 케이크랄까...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했던 상체와 팔의 움직임은 이제 장식 과잉이고 하체의 움직임은 퇴보다.
실수 없이 화려한 차이코프스키 파드데의 분위기를 잘 살리긴 했지만.... 훼떼는 삐루엣으로 대충 돌리는 식으로 어려운 동작은 건너뛰고 빼버렸으니 실수를 할래야 할 수도 없겠지.
이원철씨도 실망. 신체적 조건이나 제반 여건이 딸리기 때문에 언젠가는 엄재용이 그보다 나아지리란 걸 예상했지만... 그래도 이보다는 더 발전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차라리 데뷔때가 낫다. 펄펄 날아야할 나이에 벌써 노련함만 남아버리다니. ㅠ.ㅠ 국립 발레단은 유능한 무용수를 평범하게 만드는 마굴이 아닌가 싶다.
빅토리아 테레쉬키나와 이고르 젤렌스키의 해적 2인무.
감동 또 감동. ㅠ.ㅠ
대학생 때부터 젤렌스키의 공연을 한번 보는 게 꿈이었다. 이미 광주에 갈 때부터 감동을 받을 자세가 되어있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혀 아닌 무대였다면 이렇게 좋아하지는 못했을 듯. 이 커플이야말로 정말 갈로 공연의 정신에 충실했다.
실수하지 않고 깔끔하고 흠잡을 데 없는 공연에 주력한 다른 커플들과 달리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보여주려는 자세가 보였음.
젤렌스키의 첫 등장 장면. 정말 날아서 들어오더라. ㅠ.ㅠ 객석에서 다들 비명이 저절로 아아악~~~ (물론 나도 포함. 옆의 애 때문에 조금 놓치긴 했지만. -_-;;;)
그동안 갈라나 전막에서 수많은 알리를 만났지만 젤렌스키와 앙헬 코레야를 최고봉에 놓기로 했다. 코레야는 환상적인 삐루엣에 젤렌스키는 눈부신 점프에... 어쩌면 그렇게 그랑제떼에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넣을 수 있는지. 노련미와 힘이 넘치는 데다 기특하게도 최선을 다 해주는 모습에 광주에 간 보람을 100% 찾았다.
남자 무용수가 저렇게 나오니 당연히 여자쪽도 자극이 될 수밖에 없다. 서로를 자극하는 신명난 무대는 이렇게 다르다는 걸 보여준 커플이었다고나 할까.
전막이 아니지만 젤렌스키의 무대를 봤다는 점에서 행복한 시간이었음. 조만간 일본에서 공연했던 젤렌스키의 해적 실황(거기선 콘라드)을 한번 봐줘야겠다~
이날 소개 자막에 소소한 실수가 많았지만 그 모든 실수를 다 누르는 백미는 바로 해적 해설. 콘라드는 해적 선장이고 알리가 노예건만. 꿋꿋이 해적선 노예 콘라드와 바닷가 마을 소녀에서 공주로 격상된 메도라로 박박 우기고 있음. 뭐... 수능에 나올 일이 아니니 굳이 나서서 정정해줄 필요는 없겠지.
휴식 후 2부 첫 공연은 광주 시립 무용단의 춘향.
박선희와 오윤환이 춘향과 이몽룡을, 김선돈이 방자, 이지선이 향단을 춤췄다.
자야하는 관계로 간단히... 안무가에겐 미안하지만 춘형과 몽룡의 파드데엔 참신함이 하나도 없다. 돈키호테와 라이몬다가 섞여 있다고 보면 됨. 차라리 향단과 방자의 부분이 어느 정도 특징이 있었다고나 할까.
모방이 창조의 시작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자기 아이디어는 필요했다. 전막을 보지 못했으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프티파가 도작이라고 펄펄 뛰어도 할 말이 별로 없을듯.
리즈키나와 파데예프의 지젤 2막.
콩쿠르라면 입상권에 충분히 들 정도의 깔끔하고 흠잡기 힘든 무대였다.
그.러.나. 무대 공연에서 필수적인 사람을 확 잡아끄는 매력은 별로 없었다.
이렇게 냉정하게 얘기하는 데에...열악한 관람 환경으로 인해 집중을 할 수 없었던 데도 이유가 있겠지. 지젤 2막 같은 부분은 몰입이 필요한데 그럴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시킬 수 있는 무용수들이 분명 있다. 이건 객석도 객석이지만 무용수들의 책임도 큼.
마농 1막 2장의 침실 장면. 젤렌스키와 테레쉬키나 커플.
나의 젤렌스키씨와 광주 예술회관의 궁합이 영 꽝인지... 회관의 최악 그 자체인 오디오 시스템 때문에 망한 무대. ㅠ.ㅠ 절대 스테레오일 수 없는 모노 스피커의 답답한 음악에 발레가 완전히 죽어버렸다. 그동안 LG 아트센터의 곡마단 사운드를 내는 스피커 욕을 엄청 했는데 이제 깨갱하기로 했다. 곡마단 사운드가 모노보다는 백배 낫다.
어수선한 객석에다 반주 음악의 볼륨까지 약하니 이 멋진 장면에 몰입이나 감정 이입은 불가능. 그냥 데 그뤼의 이미지에 너무나 어울리시는 젤렌스키님의 데 그뤼를 봤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음.
그런데... 망원경으로 보니 많이 늙긴 늙었더라. 89년인가 찍은 백조의 호수에서 펄펄 날아다니던 샤방샤방 오라버님이 로맨스 그레이로 변신한 모습이 좀 슬프긴 했지만... 나도 샤방한 꽃미남 오라버님 보다는 미중년에 몰입하는 게 덜 주책이 되는 나이로 접근 중이니... ㅠ.ㅠ
안토니체바와 네포로지니의 돈키호테 3막 파드데.
피날레라는 인식을 했는지 조금은 오버하면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줬다.
바질의 의상은 네포로지니의 그 눈부신 절대 각선미를 확실하게 보여줘서 더 즐거웠음. ㅎㅎ 도약이며 회전도 신경을 쓰는 것 같긴 했지만 앞서 해적에서 워낙에 튀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자꾸 비교가 되어서 그럭저럭.
그래도 나름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용서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쪽도 할 말이 없는 것이... 박수로 박자를 맞추면 안 되는데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면서 박자 맞추는 관객들 때문에 훼떼나 삐루엣 돌 때 엄청 헷갈렸을 것이다. 내가 조마조마했을 정도니. -_-;
마지막으로 내 평생 프라임 오케스트라가 이렇게 잘 하는 건 처음 봤다. 정말 프라임이 맞는지 확인까지 해봤을 정도. 반주가 아니라 방해를 하던 이 단체가 처음으로 반주라는 걸 했다. 이건 지휘자의 힘이 아닐까 싶은데... 서울서 발레 공연할 때 그 지휘 엄청 못하는 러시아 남자 좀 불러오지 말고 이 김훈배씨를 초청하는 게 훨씬 낫겠다 생각했다.
공연장이 조금만 더 시원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에너지 절약이라는 국가 시책에 정말 모범적으로 동참하는 광주시였다. 반대로 철도청은 절약을 좀 해주면 좋겠음. 공연볼 땐 더워서 죽을 뻔 했고 기차에선 추워서 죽는 줄 알았다. 얇은 숄을 가져갔는데 그걸 덮고도 추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