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절대 밤은 지세우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내게 어쩔 수 없이 밤을 하얗게 불태우고 해가 뜨는 걸 보는 마감을 하게 한 원흉. 그래도 후회는 절대 하지 않는다. 좋은 공연을 보고 나올 때 느끼는 충만한 만족스런 아우라를 가득 받아서 나왔다. 만약 이 공연을 보지 않았으면 토요일의 라이몬다에 내내 찜찜했을 것 같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연달아 본 김주원&김현웅 커플과 마리아 알라쉬& 알렉산더 볼치코프 커플의 무대를 보면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떠올렸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은 첼로를 배운 학생은 모두 필수적으로 배우는 곡이고 거장들의 레퍼토리나 녹음에서도 절대 빠지지 않는다. 엄청난 테크닉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눈에 확 띄게 화려한 곡은 아니지만 연주의 실력과 연륜이 더해짐에 따라 같은 곡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편차를 보인다.
두 커플의 라이몬다는 그 숙련도의 편차가 공연 전체의 질을 갈라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공연은 좀 미안한 소리지만 음악을 타는 건 고사하고 박자 맞춰서 동작을 따라하기에도 급급해 보였다. (불행히도 박자조차도 잘 맞지 않았다.) 춤 자체에 천착하기 보다는 쉬운 길을 택해 춤에 겉멋을 덕지덕지 바르기 시작한 뒤로 김주원씨에 대한 내 호감도나 개인적인 평가는 별로 높지 않지만, 그건 그녀의 데뷔 때 기대했던 수준으로 올라가지 못했기에 하는 냉정한 비판이지, 어쨌든 그녀는 꽤 매력적이고 능력이 있는 무용수이다. 내가 옛날에 운영하던 홈피의 라이몬다 관련 글에 김주원씨의 라이몬다를 꼭 보고 싶다고 썼을 정도로 그녀는 이 작품에 딱 어울리는 우아함과 품격을 가졌었다. 그런데 프티파라는 클래식의 거장이 마지막 불꽃을 불태워 만든 라이몬다는 아다지오가 많아서 자신의 약점을 화려한 치장으로 커버하는 잔재주나 멋을 부릴 여지가 별로 많지 않다. 더불어 익숙치가 않은 작품이기도 했고. 내내 모래 주머니를 하나씩 차고 춤추는 것처럼 무겁다고 느꼈고 그래서 엄청 불편했었다.
일요일 낮공연의 볼쇼이 커플은 국립 발레단의 김주원, 김현웅 커플에게는 생소한 이 작품이 오래 입어서 익숙하고 편안한 옷으로 보였다. 전날엔 왜 저렇게 이상한 각도로 관절을 꺾나 했던 동작들이 헝가리의 민속무용 차르다시의 변형 동작인 모양이구나~를 확실히 느끼게 해줬다.
사실 전체적인 실수 횟수를 따지면, 너무 조심스럽게 춤춰서 갑갑하긴 했지만 토요일의 국내 커플이 오히려 적게 했다. 볼치코프가 여기저기서 꽤 삐걱거리고 중간중간 살짝 힘조절을 해가면서 약게 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막 초중반부까지는 정말 어제와 같은 발레를 보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편안하게 잘 흘러가는 무대. 정말 어렵고 고난이도구나~라고 느꼈던 1막의 리프트들도 너무도 가볍게 폴짝, 살짝, 휘리릭~ 라이몬다의 친구들을 춤추는 솔리스트도 볼쇼이 단원들이 와서 춤췄는데 많이 해본 거라 그런지 확실히 편안. 주역부터 솔리스트들이 전체적으로 능숙하고 자신감이 있는 공연이었다.
이렇게 주역들의 자신감이 팍팍 받쳐주니까 시너지 효과가 나서 그런지, 아니면 어제 공연을 통해 연습이 한번 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군무진들도 일취월장. 특히 1막 2장의 꿈속 장면 군무들은 솔직히 키로프가 별로 부럽지 않았음. ^^ 확실히 무대 예술은 자신감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정말 새삼스럽게 재확인.
불만스러웠던 토요일 공연에서 그나마 볼만한 부분이 장운규씨의 압데라흐만이었는데 -확실히 나이는 날로 먹는 게 아닌지 파트너 서포트나 리프트가 정말 안정적- 오늘 압데라흐만도 존재감 작렬!!! 스파르타쿠스에서 휙휙 날아다니던 드미트리 벨로갈로체프답게 백점프나 그랑제떼에서 몸이 휙휙 틀어지는 각도가 정말 죽음이었다.
내 앞줄에 애들 데리고 왔다가 1막만 보고 돌아오지 않은 가족들이 있었는데 -솔직히 전공시키는 게 아니면 애들한테 라이몬다는 좀 무리지- 2막까지 있었으면 캐릭터 댄스들부터 시작해서 볼만 했을텐데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음.
라이몬다의 스토리나 캐릭터 설정에 대한 불만 -이건 프티파와 토론할 문제. ^^- 이 많지만 이건 나중에 발레 카테고리에 '라이몬다' 작품 해설을 올릴 때 따로 정리를 해봐야겠다.
알라쉬 & 볼치코프 커플은 볼쇼이에서 자기들이 입던 의상을 그대로 갖고 온 모양이던데, 알라쉬의 1막 의상 색깔이 정말 환상이었음. 토요일에 라이몬다의 선명한 파란색 튀튀를 보면서 색감이 좀 튄다.... 싶었는데 알라쉬의 톤 다운된 녹청색 튀튀를 보니 고급스러움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역시 200년의 전통은 거저 생기는 게 아니다.
그리가로비치의 라이몬다는 프티파의 버전을 2막으로 간결하게 개정을 했는데, 알라쉬의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은 정확하고 자신감 있는 춤을 보니까 프티파 원 안무대로 3막에 결혼식 장면을 살려놨으면 좋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라이몬다의 결혼식 바리에이션도 엄청 화려하고 볼만 한데... 알라쉬가 춤췄으면 정말 굉장했을 것 같다.
볼치코프도 벨로갈로체프도 멋있었지만 이날 공연에서 가장 멋졌던 건 마리아 알라쉬. 언젠가 그녀의 다른 무대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최고의 서비스는 이날도 무대 인사 때 올라오신 그리가로비치 할아버지. 압데라흐만의 수행원으로 출연한 어린 무용수들을 다 데리고 인사를 하셨는데 그리가로비치 영감님과 손 잡은 애들이 부러웠음. 내가 걔였으면 손을 안 씻을 것 같다. 이날도 계신줄 알았으면 라이몬다 LD 가져가서 ㄱ씨에게 부탁해서 사인이라도 좀 받아둘 것을. 후회막급. ㅜ.ㅜ 이런 류의 청탁은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정말 싫어하지만... 다음에 또 오신다면 철판 깔고 ㄱ씨에게 사인 좀 받아달라고 꼭 부탁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