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마린스키 발레단의 공연인 동시에 역시나 6년만에 로파트키나의 백조를 보러 일산으로~
내가 그닥 좋아라~하지 않는 버전의, 1막엔 왕자가 별로 없는 안무지만 그래도 잘 하는 사람들이 추니까 그 상황에서도 존재감을 발하기는 하더라는... 역시 실력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입증해주는 공연이었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는 볼쇼이나 ABT, 파리 오페라 발레단과 달리 오로지 백조를 위한 백조 중심의 안무이다. -이건 초연 때 왕자를 맡은 남자 무용수가 춤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 죽겠으니 지그프리드 왕자의 춤 좀 줄이라는 불평을 한 덕분. --;-
여하튼 그래서 사실 스토리 진행상 말고는 그다지 존재 가치가 없는 왕자님인데, 다닐 코르선체프는 거의 없다시피 한 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연이 드러낸다. 오버하는 건 하나도 없이, 그야말로 교본 같은 춤인데 다른 상황에서는 욕이 될 수도 있는 그 '교본 같다'는 말이 칭찬이 될 정도로 정말 기가 막히게 정확하다. 공중 동작도 크고 꽤 높은 편인데 착지할 때 발의 포지션이 만화로 그려놓은 듯 정확. 초반엔 그런가 보다~ 했는데 2막이며 3막 4막까지 절대 흐트러짐이 없다. 동작에 이런저런 바리에이션을 넣거나 화려하게 치장을 하는 것보다 이렇게 정석대로의 움직임으로 눈을 끈다는 건 정말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마린스키 발레단의 프린시펄들은 그런 면에서 굉장히 뛰어난 것 같다. 이 다닐 코르선체프처럼 감탄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수요일에 지젤 공연 때 소모바나 파데예프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음.
로파트키나는... 신의 불공평함을 절감하게 해주는 시간이었음. 그 미모에 그 몸매에(더군다가 애 엄마가!!! 난 정말 반성해야 함. ㅜ.ㅜ) 어떻게 춤까지 그렇게 잘 출수가 있는지. 6년 전에 봤을 때와 비교할 수가 없다. 6년 전에 봤을 때도 잘 추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멋지군~ 역시 잘 춘다~' 였지 이번처럼 이렇게 확고하게, '난 너희들과 다른 차원의 사람이야~'라는 아우라는 풍기는 정도까진 아니었다. 등장할 때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아서 자신을 제외한 주변은 자동적으로 다 흐리게 만들어버리는, 만화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그런 카리스마! 감히... 그녀는 신만이 허락하는 경계를 넘어섰다고 하고 싶음.
1막 2장 (혹은 2막)에서 코르선체프와의 아다지오는 나뿐 아니라 아람누리에 있는 관객들 모두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열심히 지켜봤다. 솔로 바리에이션에서는 아주 미묘하게 계속 흔들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거슬리지 않는 걸 보면 역시 경계를 넘어간 예술가만의 특권을 누리는 단계인듯. 아니면 어제 홀라당 반한 나의 불타는 팬심일 수도 있고. ^^;
2막 (혹은 3막)의 흑조 바리에이션은 역시나 가장 정확하면서도 아름다운 흑조와 왕자님. 2회전은 보통이고 3회전이나 4회전도 휙휙 넣어서 도는 미스 터너들과 달리 아주 정직하게 딱딱 1회전씩만 돌아줬지만 그것에 전혀 불만을 가질 수 없는 것이... 그녀의 훼떼 포지션. 32회전의 회전이 한 자리에 콕 박아놓은 것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거의 마지막 부분에만 살짝 이동을 했지 아마 동그라미를 그려놨다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듯. 왕자님도 마찬가지. 특별한 기교는 넣지 않는데 역시나 전혀 흔들림없고 정확 그 자체. 이날 공연은 나처럼 아마추어 관객이 아니라 전공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그런 시간이었을 것 같다.
마지막 3막 (혹은 4막)은 장장 1시간여에 걸친 휴식 시간 때문에 서울로 돌아갈 길에 막연해 머리가 복잡한 덕분에 전막들처럼 집중해서 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부글부글한 상황에서도 별다른 불만이 없었던 걸 보면 역시 만족할 만한 무대.... 였다고 뒤늦게 생각하고 있음.
마린스키 측의 요청이었는지, 아니면 자기들이 있는 곳이 어딘지를 망각한 주최측의 과도한 배려였는지 모르겠지만 각 막 사이의 휴식 시간이 무려 30분씩! 합쳐서 1시간을 쉬었다. 서울이라면 늦어도 택시를 타면 되지만 거기는 일산에서도 저 북쪽 끝에 해당하는 정발산!!!! 최소한 10시 40분에는 끝나야 10시 49분 전철을 타고 환승역에 내려서 대충 막차를 탈 수 있는데 저 무지막지한 휴식 덕분에 10시 50분이 다 되서 공연이 끝났다.
일요일에 예매한 건 어쩔 수 없지만 다시는 여기 안 온다고 -우리 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비일산 거주민 모두 - 욕을 욕을 하면서 일단 버스라도 타고 서울로 가려고 튀어나왔음. 일산에서는 완전 촌ㄴ들이라 여기저기 물어물어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행운의 여신이 뒤늦게 나타났는지 막 앞에 서울에서 온 택시가 손님을 내려놓길래 친구와 반띵을 하기로 하고 그걸 타고 돌아올 수 있었다.
끝이 좋으면 모두 좋다고.... 어제 공연 끝날 때는 집에 돌아가면 아람 누리 홈피에다가 완전 성토글을 써놓으리라!!!!! 이를 득득 갈았는데 내일 이후로 두번 다시 가지 않겠다는 결심만 굳히면서 글까지 올리는 귀찮은 짓은 안 하기로 했음. ^^;
쓰다보니 생각났는데... 만날 키 작은 광대만 보다가 훤칠한 광대가 춤을 춰주셔서 역시 즐거웠고, 로트발트 진짜 멋지셨음. 쭉쭉빵빵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거겠지. 그리고 특이했던 게 마린스키는 큰 백조가 4마리였다. 보통 큰 백조는 2마리나 3마리가 나오는데... 하긴 균형미나 구조미적인 관점에서 나도 2마리나 4마리가 맞다고 봄. 3마리는 왠지 모르게 좀 쌩뚱맞아 보였다.
오케스트라는 딱 기대라는 걸 했었다면했던 그 정도의 사운드. 합창으로 치자면 소프라노와 테너가 덮어줘야 할 알토와 베이스 멜로디를 중간중간 원없이 들었다. 극적인 질적 상승을 일으키려고 했다면 관파트를 데려왔어야 했는데... 우리의 차선생은 이렇지 않소....라고 지휘자에게 메일이라도 보내고 싶었음. -_-a
그리고 또 하나. 역시 클래식한 백조의 호수는 그리가로비치 안무가 내 취향에선 최고인듯. 왕자가 1막부터 말 그대로 죽어라 뺑이치긴 하지만 1막의 그 고블렛 댄스부터 진짜 멋진데... 보면서 코르선체프와 로파트키나가 그리가로비치 버전의 백조를 추면 얼마나 멋질까 자꾸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국립 발레단에서 백조의 호수를 올리는데 (여긴 그리가로비치 버전) 객원으로 볼쇼이의 볼치코프가 와서 김지영씨와 춤춘다. 볼치코프가 고블렛 댄스 추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그리고 두 사람의 캐미스트리가 상당히 근사할 텐데... 예매하긴 요즘 내 일정이 너무 널을 뛰는구나. ㅜ.ㅜ 상황 봐가면서 시간이 되면 그냥 당일에 싼 표 사서 가던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