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누리까지 가기는 짜증나지만 그래도 좋은 공연의 연속이라 아쉬웠던 마린스키 공연의 마지막 날.
이날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발란신과 제롬 로빈스의 작품들이 포함된 갈라이다. 흥행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레퍼토리인데 이런 걸 선택해줘서 주최측에게 상당히 고마웠다. 한줌도 안 되는, 자기 돈 내고 표를 사서 발레를 보는 발레팬들에게는 아주 고맙지만 발레랑 어지간히 코드가 맞지 않는 한 처음 발레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살짝 부담이 갈 수도 있는 작품들인데 용감했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음.
첫 작품은 발란신이 안무한 스코틀랜드 심포니.
멘델스존의 스코틀랜드 심포니를 연주하거나 들으면서 단 한번도 이게 춤곡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걸 스코틀랜드의 분위기가 풍기는 -물론 진짜 스코틀랜드 사람에게는 흉내만 낸 코웃음거리일 수 있겠지만- 춤으로 바꿔놓은 발란신에게 감탄~
하지만... 이방인이 바라보고 만든 스코틀랜드를 역시나 또 다른 이방인이 춤춰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러시아스럽다는 생각이 살짝살짝 들었다. 뜬금없이 뉴욕에 가서 뉴욕시티 발레단의 공연을 보고 싶어!!! 이라고 있었는데 뉴욕에서 잠시 나왔다가 마침 이 공연을 본 지인의 지인은 "이런 공연은 뉴욕에서도 못 봐요!"라고 했다고 함. ^^;
바뜨... 퍼스트 솔리스트였던 예브게니 이반첸코는 오버턴인지, 턴이 모자랐는지 매번 우리들에게 엉덩이를 보여줬고 (--;) 알리나 소모바는 그녀에게 음악을 타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현저히 보여주는 발란신은 피하는게 커리어 관리 측면에서 좋을 듯.
예전에 어느 블로그에서 소모바의 차이코프스키 파드데를 엄청 강하게 비판한 글을 봤을 때 그 혹평의 정도에 '좀 오버 아닌가?' 싶었는데 그 공연을 봤다면 나도 비슷한 수준으로 씹었을 것 같다. 발란신의 작품은 음악을 채찍처럼 자유자재로 탁탁 휘두르거나 아니면 바람에 시폰 스카프가 하늘하늘 날아 다니는 것 같이 타줘야 하는데 그게 전혀 안 됐음. 드라마가 있는 지젤에서는 커버가 되는 단점이 발란신에서는 극대화되서 나타난 것 같다.
두번째 작품은 제롬 로빈스가 안무한 인 더 나이트 (나잇?)
쇼팽의 야상곡에 맞춰 세 커플이 등장하는데 미모로 따지자면 쉬클리야로프 커플이 최고였지만 춤은 내 취향에선 테레쉬키나&코르선체프> 쉬린키나 & 꽃돌이 > 콘다우로바 &즈베레프였음.
앞서 스코틀랜드 심포니에서는 뭔가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은 어색함에 뉴욕시티를 보고 싶어~ 였지만 여기선 뉴욕시티 전혀 필요없다! 얘네들이 최고!!! 모드였다. (뉴욕시티 발레단의 공연으로 이 작품을 본 분도 얘네가 더 낫다고 평가를 했다고 함.)
하지만 피아노는 정말 꽝이었다. 내 이날까지 피아노로 반주를 하는 공연을 꽤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삑사리를 많이 내는 피아니스틑 정말 처음이었음. 몰입이 좀 되려고 하면 불협화음이 울리다보니 나중엔 피아노가 틀릴까봐 조마조마한 수준. --; 조마조마한 건 오케스트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이 작품은 사실 굿보다 떡이라고 꽃이 샤방샤방 날리는 인간 같지 않은 미남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가 과연 실존하는 인물이냐, 아니면 사진빨이냐를 점검하기 위한 목적과 기대가 더 컸다. 마리아 쉬린키나와 등장한 쉬클리야로프는 인간이 저렇게도 생길 수 있구나를 보여줬음. 친구 ㅅ양 말마따나 주변에 블링블링 처리와 꽃그림 배경은 필수인 그런 미모였다. 다만 하늘이 공평하려고 했는지 휜칠한 다른 남자 무용수에 비해서 키는 평범. ^^; 그리고 본인이 잘 생겼다는 걸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왕자병이었다. 하지만 저런 살아있는 엘프라면 왕자병이라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고 알아서 용서. ㅎㅎ; 커튼콜 할 때 이 꽃돌이의 왕자병 모드나 허술함은 이날 또 하나의 큰 즐거움이었음. 다음에도 꼭 오면 좋겠다. 발레리나가 어지간히 내 취향이 아닌 한 이 꽃돌이의 공연을 꼭 가줘여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세번째 작품은 마린스키 유일의 한국인 단원이자 솔리스트인 유지연씨의 은퇴 공연인 빈사의 백조.
프로필로 따지면 그녀는 정말 화려하다. 바가노바 아카데미 최연소 입학에다가 한국인 최초로 -아마 외국인 최초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가노바 아카데미 수석 졸업을 해서 졸업공연인 호두까지 인형에서 주인공 마샤 (혹은 클라라~) 역을 맡으며 화려하게 마린스키에 입단을 했었다.
그녀에게 밀려 2등이었던 비쉬네바가 화려하게 날아오를 때 표현은 못 해도 속이 좀 끓긴 했었을 것 같은데... 그 절치부심이 좀 더 강렬해서 주역까지 하고 이렇게 은퇴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같은 국적의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들었다.
뭔가 만감이 교차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빈사를 백조를 보면서 왜 유지연씨가 마린스키의 프린시펄이 되지 못하고 솔리스트에 머물렀는지를 이해할 것 같다. 바가노바 졸업 동기로 같은 해 함께 입단해 아마도 그 다음해에 수석으로 발탁된 초고속 승진(?)의 주인공 비쉬네바를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는 않지만... 비쉬네바에겐 있고 유지연에게 없는 것. 그건 주역급 무용수들만이 갖는 존재감이나 무게감. 무용수마다 색채나 성격은 각기 다르지만 그런 게 확실히 있는데 유지연씨는 좀 무미건조하달까 약했다.
상당수 발레팬들에게 함량 미달로 평가 받는 무용수도 꾸준히 프린시펄을 하면서 버텨내다보면 어느 순간 비슷한 느낌이 생기기도 하던데... 아예 좀 더 일찍 은퇴를 해서 한국으로 오거나 주역을 할 수 있는 다른 발레단으로 이적을 했었더라면 좀 더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상상도 하게 된다.
사설이 길었는데... 앞으로도 꽤나 오랫동안 나오기 힘들, 마린스키의 한국인 솔리스트의 마지막 백조를 봤다는데 의미를 두면 될 공연이었던 것 같다.
이제 러시아에 남은 건 볼쇼이의 배주윤씨 뿐인가? 애들의 신체 조건이나 유학 조건 등은 저들이 유학가던 80-90년대에 비해 훨씬 좋은데 어째 치고 올라오는 건 오히려 열악했던 그때보다 더 못한 지 그건 쫌 의문. 예술은 스포츠와 달리 배가 고파선 잘 하기 힘든데???? 미스테리다.
마지막 작품은 갈라 등에서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하는 파키타.
3막인가 4막의 결혼식 디베르티스망 부분인 것 같다. ^^; 프로그램엔 설명이 정확하게 안 되어 있고 파키타의 전막 공연을 본 게 벌써 7년 전이라 가물가물... 그때 샀던 프로그램 찾아서 확인하기도 귀찮다.
갈라의 분위기에 딱 맞는 마지막 작품답게 흥겹고 화려하다. 한국에 온 프린시펄과 솔리스트들이 총출동해서 뽐내는 무대인데 당연히 주역은 현재 마린스키의 여왕인 로파트키나. 오늘도 엄청난 존재감과 우아함을 과시하긴 했지만 훼떼는 전전날 백조와 달리 마구 흔들려 주시고 솔로 바리에이션은 전반적으로 좀 버벅.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아우라를 제외하고 그냥 춤만을 놓고 봤을 때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테레시키나였다. 휙휙 날아오르는 그랑 제떼며 각도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날카로운 다리와 팔 포지션들을 보면서 '테레쉬키나의 지젤을 봤었어야 하는데.' 속으로 피눈물을 다시 한번 흘렸다. 저런 분위기와 춤이었다면 지젤 2막이 정말 죽음이었을 텐데... 저걸 놓치다니... ㅜ.ㅜ
조금은 비대중적인 프로그램 때문인지, 아니면 머나먼 일산이라는 조건 때문인지 일요일은 표가 덜 팔렸던 모양이다. 초대권 관객이 많은 공연은 분위기부터 티가 나는데 전반적으로 좀 많이 어수선. 그리고 앞쪽의 빈 자리로 옮겨가는 사람들과 그걸 돌려보내는 내부 스텝들의 실랑이도 장난이 아니었다. 보통은 돌아가라고 하면 창피해하면서 돌아가는데 역정을 내거나, 끈덕지게 버티거나 대단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앞줄의 두 아줌마.... 그러고 보니 6년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당시에 키로프 발레단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왔을 때도 그렇게 지독한 중년의 한쌍이 있었는데. 이번 아줌마들은 결국 패배하셨고 그때 그 한쌍의 중년은 끝끝내 승리해서 버텨냈다.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
오케스트라는... 그냥 포기하면 편해~의 모드로 편안하게~
무대 스텝들의 능력이 떨어지는지, 인원이 모자라는지 휴식 시간이 너무 길다는 흠을 제외하고 아람누리는 의자 간격이나 높이, 시야도 잘 확보를 해놨고, 안전 바 때문에 시야를 가리는 일도 없이 내부 배치며 음향이 예당보다 나은 것 같다. 건물 배치는 링컨 센터의 향기가 물씬~ 이렇게 멀지만 않으면 사랑해줄텐데... 여기 다시 가는 일은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오지 않는 한 아마 다시 없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