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기 전에 간단히라도 끄적이려고 앉았음. 작년에 총체적인 게으름에 시달리면서 책이며 연주며 그때그때 쓰지 않아서 날려버린 것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남는 건 기록 뿐인데... 지나간 건 후회해도 소용 없으니 올해는 간단히라도 써야겠다.
오늘 캐스팅은 파미노 - 로저 빠두레스/ 파미나 - 렌카 투르카노바 / 밤의 여왕 라일라 벤함자/ 파파게노 버질 프라네 / 파파게나 마틴 미두/ 자라스트로 얀 쿠체라/ 모노스타토스 쟝 - 크리스토프 본.
마슬피리를 아주 많이 좋아하기 때문에 꽤 여러 공연을 봤었다. 하지만 그동안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음향과 무대에 노래가 묻어가다보니 잘 느끼지 못했는데 딱 동선을 단순하게 잡으면서 주연들의 움직임과 연기에만 집중을 해서 보니까 음악과 언어가 착착 달라붙는 그 맛이 느껴진다. 아리아도 아리아지만 레시타티보에선 정말 그게 절실하게 느껴진다. 한국말로 '안녕', 혹은 '잘 가' 또는 영어의 Good Bye 나 So long으로 로 발음해서는 절대 낼 수 없는 그 찰진 느낌이랄까... 모국어를 가장 아름답게 음악에 실어주는 작곡가를 가진 독일과 이태리인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다.
엄숙한 사회 풍자와 함께 유쾌한 웃음 코드로 가득한 마술피리를 피터 브룩은 모짜르트 당시 오페라 부파의 기능에 딱 맞도록 연출을 했다. 아마 18세기의 관객들도 오늘 우리가 웃었던 부분에서 배를 잡고 웃고 깔깔거리면서 가사를 음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형화된 엄숙주의나 연출가 혼자만 이해하는 그 초현설적인 파격주의로 흐르는 국내 오페라 연출가들이 생각해볼 부분인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미있게 잘 봤고 소소하게 들어가자면 파미노는 막판에 목이 좀 풀리는 것 같긴 했지만 약했고, 자라스트로는 연기와 존재감은 최고였으나 역시 가장 중요한 노래가 중간중간 불안했고 밤의 여왕은 1막에서 불만을 싹 다 날려주는 2막의 아리아를 들려줬음. 간만에 머리털이 쭈삣 서는 제대로 된 콜로라투라 음색과 테크닉을 감상했음. 파파게노는 워낙 캐릭터가 강한 터라 보통만 해도 튀는데 오늘 파파게노는 노래도 잘 해주셨음. 파파게나와 파미나도 들은만 했고, 모노스타토스는 다른 연출에서는 항상 흉측한 시커먼 흑인으로 등장했는데 오늘은 파미노보다 훨씬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멋진 가수라서 이번엔 이쪽에 더 감정이입. ㅎㅎ;
모짜르트 특유의 유려한 오케스트라 음향을 걷어내고 피아노로 반주를 한 건... 이 음악을 좋아하는 내게 살짝 불만이긴 했지만 이 무대에는 최선의 선택이었지 싶음. 피아노가 낼 수 있는 다양한 음색을 잘 들려준 피아니스트에게 감탄을 했음.
대나무를 울타리처럼 이용해 무대를 분할하는 아이디어는 자칫하면 산만하기 쉬운데 참 희한할 정도로 유기적으로 잘 움직였다. 비슷한 아이디어를 여러 무대에서 봤었는데 피터 브룩의 것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 무슨 이유인지... 아주 사소한 한끗 차이가 1류와 2류를 가르는 모양이다.
날씨도 좋았고 모처럼 괜찮은 음악을 들은 즐거운 오후였음.
발레 공연들도 조만간 예매를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