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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픽션

채식주의자, 흰,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by choco 2025. 3. 23.

작년 겨울에 한국에선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왔고, 너무나 크고 감사한 행운으로 그 수상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다. 방송사 여기저기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상을 기념하는 특집을 여러 편 만들었고 그중 하나라고 폄훼할 수도 있겠지만 노벨상의 역사와 그걸 받은 국가와 작가와 또 그걸 기록하는 방송작가들의 숫자를 보면 정말 로또 1~2등에 버금가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 행운의 별에게 다시 빌자면 담달에는 대선토론 프로그램 또 할 수 있기를. 🙏🙏🙏🙏🙏🙏🙏🙏🙏🙏)

나라가 정상이었다면 아직도 노벨문학상의 여운에 젖어 있고 수많은 축하가 계속되고 있었을 거다.  나 역시 숨가쁘게 한 방송을 끝내고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차곡차곡 여기에 적어놨을 텐데 12.3 날벼락과 숨어있던 악귀들이 다 튀어나와 난동 부리는 것 때문에 그런 고차원적인 작업은 불가능.  

어제 못 간 대신 오늘 광화문에 머리수 채워주려고 했는데 오늘은 쉰다는 소식에 책에 대한 간단한 한줄 감상이라도 남겨놓으려고 함. 고백하자면 악귀들에게 정신이 털려서 남은 게 없지만 억지로 짜내어보련다.

** 채식주의자

첫 줄만 읽어도 그 남편이란 놈의 찌질함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 문장을 보면서 한강이란 작가는 정말 난 사람이구나 생각했음. 처음엔 앰블런스가 달리는, 절망과 희망이 교차되는 그 마지막의 강렬함이 확 다가왔지만 두고두고 남는 건 그 첫문장이었다.  한국처럼 남녀 평등지수가 낮은 국가일수록 그 반응이 강한 것 같다. 

 

** 흰

프로그램에선 다루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하얗고 서정적이고 쓸쓸하고 아름다웠던 글. 이 느낌이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엿보일 때 괜히 내적 친밀감을 느끼고 즐거웠다. 

 

** 소년이 온다.

책을 펼치는 자체가 너무 어마어마한 고통. 읽기 힘들다고 토로하는 것조차 광주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미안해서 아프다고 얘기할 수도 없었던 책. 과거엔 아예 읽을 엄두도 내지 않았으나 프로그램을 위해서 마음을 다잡고 읽어야 할 모든 책을 다 읽은 뒤 마지막에 겨우겨우 열었다. 난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고 요약하는 ai라고 생각하며 감정과 마음을 다 차단하고 그야말로 활자만 읽어내려가는데도 힘들었다.  그 고통을 감내하고 이 글을 쓴 한강 작가에게 경의를 표함.  

 

** 작별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칼로 찌르고 저며내던 소년이 온다와 달리 천천히 삶겨지는 개구리가 되는 느낌. 몽환적이고 뭉근한 흰빛에 홀려 발을 담궜다가 나중에는 뜨거워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 우리를 대신해서 격통을 감내하면서 역사를 문학으로 승화시켜준 작가에게 감사한다.  

잘 쓴 소설이 주는 몰입과 후유증이 두려워 오랫동안 문학을 멀리하던 내게 지난 11월과 12월은 밀린 빚과 이자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시간이었다.  힘들긴 했지만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함.  아니 에르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네이딘 (혹은 나딘) 고디머의 작품들은 조만한... 혹은 언젠가. 

광복 60주년 때 한국 현대문학 3부작을 하면서 투쟁과 서사의 시대는 가고 작가들은 이제 개인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의 내레이션을 썼었는데 개뿔.  80년의 봄을 얘기할 때 인디안 섬머란 표현을 썼었는데 그때도 인디언 섬머였다.  2024년 겨울과 2025년의 봄은 어떤 작품을 낳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