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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소위 무슨 기행 등등이란 제목이 붙은 기행문류의 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어딘가 낯선 고장에 갔다온 흔적을 글로 남겨두기 좋아하면서도 남이 다녀온 흔적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런류의 글에 가득하기 쉬운 허영과 과시욕이 보기 싫어서이다. 명확한 테마가 있는 경우는 좀 낫고 극히 몇개의 예외가 있긴 하다. 하지만 요즘 소위 팔린다는 테마는 주로 먹고 혹은 뭔가 예술적이거나 특별한 것의 맛보기 내지 유한층의 배부른 사유의 기록인 경우가 많아 차라리 여행 가이드 수준의 기행문이 더 나은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신경림씨의 민요기행은 달랐다. 그동안 내가 기행문학에 대한 인상을 확 바꿔놓게 하고 내 책읽기가 얼마나 편협했냐를 느끼게 해주는 깊이랄까... 사유가 있다.
이 책은 1983년 10월부터 1985년 2월까지 신경림 시인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빠르게 사라지는 우리 민요를 찾아 헤매고 농촌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단순히 민요를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 민요가 자생되어 온 지역과 시대, 민요를 부르던 사람을 보고 있고... 민요와 함께 속절없이 사라지는 농촌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사라지는 민요보다 그 민요를 담아오던 농촌의 어려움과 그들이 사라지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있다. 일단 이 부분에서 나는 호감을 느꼈다.
학자나 탁상행정가, 또 소위 매니아들이 많이 범하는 우는 그들이 연구하고 지키려는 것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그것을 위한 희생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믿음과 예술, 혹은 학문을 너무나 소중히 여긴 나머지 인간이나 생명에 대한 사랑이나 관심을 잊어버리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런데 신경림씨는 인간이 있고 농촌이 있고 그 다음에 민요가 있다는 자세로 그 관계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이 책은 80년대 초반 한국 민요에 대한 기행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 이미 깊이 병든 우리 농촌의 모습을 보여주는 보고서이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농촌 죽이기에 앞장서는 무능한 정부와 관리들의 모습이 비춰지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조직적인 죽이기가 노골화된 요즘에 비해 그나마 잘 사는 농촌이라는 구호라도 살아있던 80년대. 그러나 그때도 이미 환상만 가득한 가운데 농촌의 희생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때 머리에 X 대신 뇌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가진 인간이 집권을 했더라면 하는 소용없는 아쉬움만이 남는다.
여기까지는 이 책에 대한 나의 느낌. 이제부터는 일에 필요한 내용들의 요약이다.
아리랑에 대한 조사를 위해 이 책을 잡았다. 아리랑이 우리 민요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듯이 확실히 이 책에는 생각보다는 아리랑에 대한 기록이 적다.
기억해둬야할 요점만 정리를 좀 해보자면.
1. 여기 기록된 것은 광복군 아리랑, 너무나 유명한 정선 아리랑 (여기에 취재하러 간다. ㅠ.ㅠ), 스쳐지나가며 언급한 밀양 아리랑과 진도 아리랑 정도.
2. 지역색이 확실했던 아리랑 중에서 전국구가 생겨나고 후렴구가 뒤섞이게 된 시작은 1865년 대원군의 경복궁 창건 이후. 전국에서 징발된 일꾼들은 각 지역에서 불리던 아리랑을 노동요로, 혹은 노는 자리에서 불렀고 당연히 뒤섞이기 시작했다.
3. 일제 때 식민지 경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일본의 공사판 역시 아리랑을 비롯한 민요의 교류에 기여 아닌 기여를 했다.
4. 6.25와 60년대 근대화 정책으로 인한 인구 대이동 역시 민요의 이동을 활발하게 하긴 했지만 이때는 이동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소멸의 길로 가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80년대 초반에도 이미 자취를 찾기 힘든 우리 민요를 좇으면서 신경림 시인은 민요는 살아있는 농촌에서만 남아 있다고 한탄했다. 그때부터 벌써 20년.
얘기가 좀 옆으로 새는데 2004년에 풍어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하면서 황루시 교수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어촌이 잘 살고 그 어민들의 추렴과 풍어에 대한 기원을 담아 열리는 것이 진정한 풍어제이다. 어설픈 문화 보존을 위한 자금 지원이 아니라 어촌이 잘 살 수 있게만 하면 풍어제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 남해안의 풍어제는 이미 완전히 단절되었고 서해안은 정부의 보조를 받는 쇼로 남아 있고... 우리나라에서 온전하게 그나마 마을 단위로 풍어제가 열리는 곳은 동해안 뿐이다. 문제는 그 동해안의 풍어제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 풍어제를 여는데는 최소 몇백에서 몇천 단위의 돈이 필요하다. 그걸 마을 주민들이 추렴을 해서 내야하는데 그 정도 여유를 가진 마을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다행히 동해안의 한 마을에서 열린 풍어제를 촬영하면서 느꼈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잔함과 조급증이 신경림 시인의 민요기행을 읽으면서 다시 찾아온다.
박제만 찍을 것 같아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