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는 내가 그동안 본 뮤지컬 중에서 지존중의 지존이다. 과연 영화를 어떻게 뮤지컬로 만들 수 있을까 내심 궁금했는데 이건 영국 -마음 먹는다면 러시아 정도-에서만 공연이 가능한 작품.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엔터테인먼트 + 감동과 드라마까지도 다 잡아냈다.
일단 각본과 연출의 승리.
영화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뮤지컬 대본도 썼다는데 자기 영화에서 확실히 독립을 했다. 분명 아까울 부분도 있으련만 과감히, 그러나 살려야할 부분은 다 살려냈고 연출가 역시 그 대본에서 이상의 것을 뽑아냈다. 이런 작가와 감독이 만나는건 서로간의 행복이란 생각이 다 들 정도.
여러가지 부분들 하나하나가 다 감탄이 되지 않는 것이 없지만 특히나 연출과 대본의 절묘한 결합이라고 할 부분은 빌리가 처음으로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발전하는 부분.
어설프게 끊지 않고 광부들과 경찰들의 대치 vs 빌리의 레슨이 한번씩 밀려났다 드러났다 교대로 교차되면서 빌리가 점점 발전하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서서히 드러난다. 점점 고조되면서 숨가쁘게 몰아치던 분위기가 빌리가 아티튜드 동작을 완성하는 부분에서 절묘한 정지. 이건 눈으로 보지 않고는 정말 설명 불가능이다. 일순간 세상이 정지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리고 빌리가 발레에 대한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춤추는 장면은 성인 무용수와 빌리의 듀엣으로 처리를 했는데 이 부분 역시 가슴이 찡하다. 다만 아쉽다면 아쉬운 것이 성인 무용수의 능력과 표현력에 초점이 더 맞춰지다보니 어린 빌리가 좀 버거워하는 것이 보이는듯. 이날 컨디션이 안좋은 것인지 가끔 삐걱거리고 놓치는 것같은 동작들이 분명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인 안무의 완성도가 워낙에 높다보니 그게 거의 거슬리지 않음.
호모 섹슈얼적인 요소를 뺀, 남자 두명의 이인무가 이렇게 역동적이면서 찌릿찌릿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에서 안무가에게 다시 한번 박수.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선생에게도. ^^ 역시 걸작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걸작으로 불리는 거다.
뮤지컬을 보면서 눈물이 나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여자들이 다 손수건을 꺼낸다는 미스 사이공을 보면서도 난 완전히 덤덤했다. 미군하면 우리 동네 주변을 껄렁거리는 미8군의 백인 쓰레기 종자들을 워낙에 많이 보다보니 솔직히 감정이입 전혀 안됨이다. 좀 미안한 얘기지만 돈없는 엘리트나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갈곳없는 쓰레기들이 모인 곳이 미국 군대란 것이... 한국에서 오가는 미군들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샜는데 눈물이 났던 부분으로. ^^ 입학 시험 안무를 위해 발레 선생은 빌리에게 그를 표현하는 것을 가져오라고 시킨다. 그 말에 각종 허접쓰레기와 함께 죽은 엄마의 편지를 가져왔다. 그걸 처음엔 빌리가, 발레 선생이 그리고 엄마가 나타나 편지 내용을 노래 부르는 장면에선 극장 전체가 훌쩍훌쩍. 처음엔 혼자 참아보려고 했지만 다들 훌쩍이는 분위기라 마음놓고. ^^;
엄마와 죽음이라는 코드는 인종과 국가를 가리지 않고 감정선을 자극하는 코드란 것을 알았다. 이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겠지.
이 뮤지컬을 보면서 내내 가졌던 아쉬움은 내가 영어를 좀 더 잘 했더라면... 빌리와 아버지, 그리고 그의 주변 사람들이 쓰는 영어는 전형적인 하류층 영어. I 가 아니라 me go 어쩌고 하는 영어는 영국 작가가 쓴 책을 읽을 때 사투리나 하류층이 등장할 때 나오는 문법이다. 억양도 -나중에 프로그램을 보니 특별히 트래이닝을 받았다고 한다. 빌리의 친구는 거의 모든 대사에 욕이 끼어있다. 아는 욕이 반, 모르는 욕이 반이었다. ㅎㅎ;;; 여하튼 이런 관계로 더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억양을 단순히 지역이나 출신을 나타내는 도구로만 두지 않고 코메디로 또 적극 활용하는 점에서 또다시 감탄. 연출자의 아이디어인지 각본가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재기발랄함이다. 빌리가 오디션을 받으러 런던으로 왔을 때 보호자 대기실에서 빌리의 아버지는 엄청 잘난척 하는, BBC영어를 정확히 구사하는 -것으로 나름 짐작되는- 다른 보호자와 대화를 하는데 거의 외계인들의 대화 수준. ㅎㅎ; 경상도 토박이와 전라도 토박이의 대화처럼 분명 같은 나라 말이지만 통역이 필요한 분위기다. 잘은 몰라도 분위기를 보며 한바탕 웃어줬음.
그 다음에 빌리가 오디션을 받는 로얄 발레단의 주역 발레리노. 리허설을 끝내고 담배 한대 피러 나왔다가 빌리의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는데 의상과 분위기는 우아한 알브레히트 또는 지그프리트 왕자 그 자체인데 이 인간의 입담 또한 빌리의 아버지와 거의 맞먹는 수준. 상상을 해봐라. 왕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 쌍시옷과 육두문자가 붙어 있는 것을. 그 엄청난 부조화에 다들 심각한 분위기에서 또 푸하하.
감정을 밀었다 땡겼다의 타이밍이 정말 교과서로 삼아야 할 수준이다. 타이밍과 구성의 구조가 거의 신경외과 시술을 보는 느낌. 아무래도 직업적인 것은 버릴 수 없는 고로 순수하게 즐기지만은 못했다. 내내 부럽다를 연발. ㅠ.ㅠ
뮤지컬 전용 극장의 묘미를 잘 살려 무대 전환과 공중, 객석까지 완벽하게 이용하는 것도 감탄. 왜 뮤지컬 전용극장이 필요한지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서 확연히 느꼈다. 예당에 짓고있다는 뮤지컬 전용 극장은 과연 어느 정도의 매커니즘을 갖고 있을지. 벤치 마킹을 해볼 모범 답안이 이곳인듯.
그러나 한국에 뮤지컬전용 극장이 아무리 좋은게 생기고, 이 뮤지컬 판권을 설령 공짜로 준다고 해도 이 뮤지컬은 정말 영국이 아니고선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다. 어디서 이 정도 수준의 애들을 떼거리로 찾아낼 것이며 빌리와 친구 제이미를 트리플 캐스팅으로 돌릴 수 있단 말인가.
발레는 기본이고 노래와 연기까지 삼박자가 갖춰지지 않고선 도저히 불가능인데 하나나 둘은 가능할지 몰라도 셋 다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조금 힘들듯. 체력적으로 좀 가혹하단 느낌이 들 정도로 어린 배우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엄청나다. 프로그램을 보니 초창기에 찍은 사진은 볼에 살이 통통한데 무대에 선 모습은 홀쪽. 하긴 아무리 트리플 캐스팅이라도 그 정도 에너지를 소모하는데 살이 남아날 리가 없다.
영국에 가는 사람들은 강력추천. 내 평생 처음으로 뮤지컬을 장장 10만원 돈 -55파운드-를 주고 봤는데 전혀 후회없다. 그동안 같은 뮤지컬을 여러번 보러 가는 사람들 -오만석 나오는 날만 헤드윅을 5번 본 인간도 있음. -_-;;;- 을 이해못했는데 만약 내가 영국에 산다면 나도 최소한 서너번은 봐줬을듯.
좋은 공연을 본 감동과 에너지를 가득 안고 호텔로 귀가해서 새벽까지 잠을 못이루고 뮤지컬 얘기를 하면서 수다를 엄청 떨었다.
그리고 이 감상 초안을 쓴 게 10월 22일밤 11시 55분. 왜 정확히 아냐면 감상글 말미에 엄청난 투덜거림이 붙어 있다. ㅋㅋ 그대로 옮기자면...
싱글룸으로 옮겨왔는데 건너편 호텔인지 아파트에 있는 것들이 창문까지 열어놓고 끊임없이 떠들고 있다. 여기가 미국이나 영국, 혹은 독일만 됐어도 강력하게 항의를 해볼텐데 프랑스란 이유로 포기. 라틴 것들은 남들이 노는데 너무나 관대하다. 예전 두번의 경험에서 절실하게 체험했음. 그나저나 춥지도 않나? 창문이나 좀 닫고 떠들 것이지. 잠이나 자자.
이렇게 써놨다.
라틴애들은 정말 놀고 떠드는 것에 너무나 관대하다. 몇년 전 칠레로 출장갔을 때 내 객실이 4층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시끄러워서 참다참다 12시에 프론트로 내려가봤더니 1층에서 조로 같은 복장의 밴드를 앞에 세워놓고 파티중.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잘수가 없다고 항의했더니 프론트의 그녀 曰 "너도 저기 가서 같이 놀아." -_-;;;;
2층부터 객실이었는데 그날 항의한 사람은 나 혼자였던 것이었다. 차마 놀지는 못하고 구경만 했다. 정말... 정말로 내 평생에 그렇게 잘 노는 사람들은 처음 봤고 아마 두번 다시 못 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