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공연은 뮤지컬 찰리 브라운~
신당역 바로 옆이지만 갈아타기 귀찮다는 이유로 좀 걸어야 되는 동대문 운동장 역에서 내려 충무 아트홀로 갔다.
어제 십계를 선약으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면서 찰리 브라운이 어제고 오늘이 십계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내 구시렁거렸다.
좀 허접해보이는 세트에 피너츠의 캐릭터들과 이미지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 배우들이 등장한 초반에도 아쉬움과 몽롱한 상태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재미있게 몰입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직업상 난 기승전결과 탄탄하고 논리적인 구조에 좀 목숨을 건다. 연결성이 떨어지는 스토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아주 높은 수준의 춤과 노래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버라이어티 쇼 스타일의 뮤지컬은 좀 지겨워하는 편이다.
찰리 브라운은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스토리 라인이 아니라 피너츠란 만화에서 골라낸 얘기들의 연속이다. 당연히 내 취향이 아닌데 묘하게 끊어지고 이어지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정말 재밌었다.
일단 그 일등 공신은 탄탄한 배우들에게 있다.
아무리 음악이 좋고 연출이 좋아도 배우들이 받쳐주지 않으면 고문이었을 텐데, 처음엔 쟤가 누구야? 싶었던 배우들이 시간이 지날 수록 정말 찰리 브라운, 슈로더, 라이너스, 루시, 샐리, 스누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귀가 착착 맞는 팀웍과 충분히 용서할 수 있는 사소한 실수 말고는 거의 나무랄 데가 없었다.
특히 루시와 스누피. 감탄이 나오는 능청스러움과 정확한 역할 해석. 동행자가 '누가 제일 눈에 띄냐'고 묻길래 스누피라고 했더니 주원성씨라고 한다. 역시나 소리가 나온다. 아무리 뛰어난 신인의 능력이 있어도 관록이란 것은 절대 무시 못하는 것 같다. 토끼 사냥 에피소드와 능청스런 라이너스와 대화, 그리고 저녁밥을 놓고 기뻐하는 부분은 지금도 눈에 삼삼. ^^
특히 놀자로 조르는 샐리에게 "나는 잠자는 개야." 와 주인을 무시하는 모습 등등은 게으르고 꾀만 느는 우리 뽀삐를 연상시켜서 나는 더 우스웠다. 아마 뽀삐와 내가 대화를 나눈다면 분명 저런 얘기가 오갔을 것이다. -_-;;;
찰리 브라운: 인간과 개가 언제부터 친구가 됐을까?
스누피: 인간이 개에게 밥을 줬을 때부터. -_-;;;
이외에도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있지만 가장 기억나는 것 하나는 숙제에 관한 내용.
수요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독후감 숙제가 있는 월요일. 아이들이 피터 래빗 책을 읽고 열심히 독후감을 쓰는데 찰리 브라운은 수요일에 내야하는데 왜 월요일부터 이걸 해야하나 -> 지금 쉬어주지 않으면 지쳐서 못한다 -> 닥쳐서 하면 더 빨리 할거야 -> 왜 숙제를 해야하나의 논리를 혼자 발전시켜 나간다. 이걸 보면서는 딱 나의 얘기라는 자각. 마감을 앞둔 내 모습이다. 동행한 영*씨도 여기에 100% 동감.
분명 아이들의 만화를 갖고 만든 뮤지컬이지만 애들도 즐거운 동시에 어른들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른과 어린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해야겠다.
지금도 귀에 쟁쟁 울리는 첫번째 노래와 마지막 노래 해피니스. 음악도 정말 귀에 짝짝 달라붙게 잘 작곡한 뮤지컬이다. 프로그램을 샀는데 잠깐 흘린 걸 다시 가지러 갔더니 누가 그새 주워가 버렸다. -_-;;; 소장 가치가 있거나 2-3천원만 됐어도 다시 하나 샀겠지만 절대 5천원 가치를 못하는 프로그램인 관계로 가난한 누군가에게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고 잊기로 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보물을 찾은 느낌~ 가볍게 볼 수 있는 즐거운 뮤지컬이 땡기는 사람에겐 강추다.
앉은 김에 작년 파리 오페라의 칼리굴라도 쓰려고 했는데 에너지 완전 소진. 그건 또 다음에~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