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보면서 미뤄뒀던 지킬 & 하이드 감상을 올려겠다고 드디어 결심.
연이은 수정 퍼레이드와 이사 준비 때문에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한주였다.
지킬 & 하이드는 작년에 내가 로얄 발레단 공연을 보여준데에 대한 동생이 보답 차원으로 산 것이다.
조승우의 공연을 보고 싶다는 의지로 열심히 클릭질을 해서 비교적 괜찮은 자리를 구했다고 한다.
보는 동안에는 많은 생각을 했는데 시간도 많이 흘렀고 귀찮아서 간단히 정리를 하기로 했다.
1. 공연 보고 나오면서 "쟤 많이 받는다고 욕하는 인간은 욕먹어야 한다."고 얘기하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뮤지컬을 보기 전에는 조승우한테 저렇게 많은 돈을 줄 필요가 있나 하는 회의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공연을 보면서 180도로 전환. 저 돈을 충분히 받을만 하다. 돈값을 못하는 인간에게 삽질하는 것은 열받지만 돈값을 충분히 하는 사람에겐 그 대가를 정당하게 줘야한다. 그는 출연료에 합당한 능력을 보여줬음.
특히 선량한 지킬박사에서 하이드로 전환되는 그 장면. 정말 한명의 인간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극단적인 대조를 보여줬다. 단순히 소리와 이미지를 극적으로 달리하는 정도였다면 오히려 평범했겠지만 그는 동일인 안에서 내재하는 이중성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지킬인 동시에 하이드라는 것이 충분히 다가왔다고 해야하나. 연기와 노래를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뮤지컬 배우는 국내에선 솔직히 처음 봤다.
백조의 호수에서 한 발레리나가 순결과 완벽한 사랑의 상징인 백조와 유혹과 악마성의 상징인 흑조를 동시에 표현해야 한다. 그걸 정말 극단적으로 잘 해내는 플리세츠카야나 마카로바를 볼 때 느끼던 전율을 뮤지컬을 보면서 느끼긴 처음.
지킬 & 하이드는 남자 뮤지컬 배우의 햄릿이고 지젤이 아닐까 싶음. 고음은 플랫되고 저음은 샵이 되는 남*주 같은 배우와 조승우가 같은 대우를 받아야할 이유가 절대 없다.
좀 새는 얘기지만... 나도 많이 요구하고, 누구에게나 그 정도 돈을 받을 역할을 충분히 한다는 소리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음.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말 원고료가 너무나 짜다. 드라마가 제일 잘 받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솔직히 충분한 수준은 아니지. 그것보다 훨씬 못받는 우리들은... OTL
2. 어릴 때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읽었다. 어느 집에나 필수품으로 비치된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것으로. 그때 읽은 그 어린이용 명작들을 제대로 읽고 싶다는 생각에 크면서 완역판을 많이 찾아 읽었다. 로빈슨 크로소며 돈키호테, 걸리버 여행기, 해저 2만리 등. 그런데 이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단 한번도 완역판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한적이 없다. 그만큼 내게는 재미도 없었고 별로 코드가 맞지 않았다는 얘기겠지.
이번에 뮤지컬로 보면서 한 인간속에 내재하는 선과 악의 대결보다는 내게는 계급 대결로 다가온다. 웰즈의 타임머신에서 극대화됐던 노동자 계급과 상류 계급의 그 극단적인 분할. 그게 뮤지컬의 내부에 깔려있는 걸로 느껴졌다면 나의 오버일까?
서구 자본주의의 1차적인 성장은 자체 내의 하위 계층의 희생을 통해 이뤄졌고 식민지 착취를 통해 완성됐다는 생각을 뮤지컬을 보는 내내 했다. 하위 계층과 상류층의 대조되는 코러스 앙상블이 자꾸 생각을 그쪽으로 끌고 갔다.
뮤지컬을 보면서 생각이 참 뜬금없이 콩고로까지 튀었다. 작년에 콩고 민주 공화국 (옛 이름 자이레. 흔히 말하는 콩고가 바로 이 나라고 작은 콩고가 또 있다) 대통령의 방한을 위해 우호차 콩고 관련 특집 다큐멘터리를 했었다. 그때 콩고에 가서 찍어온 필름과 그 나라 역사를 공부하면서 식민지배의 비극을 실감하고 내 어릴 때 우상 중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는 경험을 했었다.
스탠리.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에서 리빙스턴을 찾아갔던 그 미국 탐험가. 삽화 덕분이겠지만 멋지고 용감한 청년으로 남았던 그가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심복으로 유례없이 무자비한 콩고 착취에 앞장섰던 인물이란 사실에 정말로 놀랐었다. 그리고 비교적 이미지가 좋았던 벨기에 역시 영국이나 프랑스는 저리 가라일 정도로 무시무시한 식민지 경영을 했다는 사실도 알았고.
내전이 일어나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패배한 다른 부족의 손을 자르는 것이 아프리카에선 상당히 만연되어 있다. 그들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이 단골 메뉴의 창시자가 바로 벨기에였다고 한다.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반항하는 흑인 노동자들을 체벌하던 이것이 아프리카 전체에 퍼졌다는데...
지킬 & 하이드는 이렇게 소위 유럽의 라 벨 에포크 시대에 배부르고 할일 없는 유럽인들이 갑자기 열광한 과학과 그 시류를 따른 문학적 유행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3. 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뮤지컬은 뮤지컬대로 나름 집중해서 잘 봤다. 엠마 역의 이혜경씨. 정말 국내 뮤지컬 배우 중에 저 정도의 미성을 보여주는 사람도 흔치 않은듯. 예전에 템페스트 때도 반했지만 정말로 팬이 되기로 했다. 극중 비중으론 엠마보다 루시가 더 높지만 엠마에 한표. ^^
초반에 공연보고 온 사람들이 앙상블이 안좋았다, 조역들이 약했다 등등의 얘기를 흘려서 조금 걱정했는데 호흡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기분좋은 무대였다. 이렇게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서 굴러가는 무대를 좋아하는 나로선 아주 만족. 이 정도면 일본에 가서도 욕은 안먹을 것 같다.
아쉽다면 마지막 결혼식 장면의 그 사제 정도. 역할 자체가 좀 그렇긴 하지만 유일하게 책을 읽었다. -_- 그리고 이건 참 쓸데없는 딴지지만... 영국의 상류계층이면 분명 성공회일텐데 장례식도 그렇고 결혼식도 그렇고 예식을 집전하는 말이나 의식이 가톨릭이었음. 그건 정말로 별것도 아닌데 좀 신경써주면 안되나? 사소한 것에서 안 먹어도 될 딴지를 걸게 만든다.
4. 장사(?)가 정말로 잘 되긴 하나보다. 공연이 아직도 더 남았는데 프로그램이 다 떨어져서 못파는 사태였다. 덕분에 공연보면서 증거인 프로그램도 하나 못 사오는 사태 발생. 솔직히 조금 짜증이 많이 났다.
이런저런 감상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쓰다보니 귀찮고 졸리다. 생각이 나면 나중에 또 추가.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