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이 정도만 되도 정말 살 것 같다.
근처에서 간단히 우동 한그릇 먹고 후다닥 세종으로~
6시부터 공연이 시작됐다.
고백하건데 난 발퀴레 1막을 끝까지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
한때 링 사이클을 다 들으리라 결심하고 카라얀이며 푸르트뱅글러 영감님의 링 전곡을 들어주기 위해 무수히 시도를 했지만 이놈의 발퀴레가 번번히 태클을 걸어서 결국 건너뛰고 듣기만을 반복. 나중에는 아무리 말짱한 정신으로 있어도 1막에서 훈딩이 나올 때 쯤이면 눈이 슬슬 감기고 몽롱해진다.
이날 공연도 음반이나 영상물이었으면 다음 부분으로 판을 바꿔 올렸거나 스킵 버튼을 열심히 눌러줬을 듯.
이 장황한 사설에서 다들 짐작했듯 이번에도 실제 공연에서도 파블로프의 X처럼 훈딩의 등장까지가 맑은 정신 유지의 한계. 비몽사몽으로 1막을 보냈다. 무의식일 망정 소리는 다 들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음. ㅠ.ㅠ
그러나 멀쩡한 정신으로 1막을 지켜본 동행자들에 의하면 지그문트도 몸이 덜 풀렸는지 그냥저냥 무난한 소리였고 자기들도 좀 지겨웠다고 해서 조금은 위로 받았음.
2막에서 브륀힐데가 히야토요~를 외칠 때 온몸에 전율이 내리면서 비로소 내가 발퀴레를 정말로 무대에서 보는구나를 실감했다.
1막에서 조금은 뻣뻣했던 지그문트와 지클린데도 2막에서는 시원하게 소리를 내주기 시작. 특히나 지클린데는... 그 가냘픈(? 상대적으로. ^^) 몸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별로 좋은 감상 태도는 아니지만 비교적 정상적인 몸매를 가진 가수들이 무대에 있으니까 훨씬 감정 이입이 잘 된다.
지그문트도 헤어스타일이며 의상이 살찐 레골라스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긴 했지만 2막 들어서는 소리가 죽죽 뻗어나오는 것이 시원시원 볼만했다.
브륀힐데의 역량... 약간은 들쑥날쑥 한다는 느낌이랄까?
어느 때는 엄청 만족스럽다가 잠시 잠깐 한 순간씩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상당한 역량을 가진 가수임은 인정해야겠다. 조금만 더 질러줬으면 하는 순간이 한번씩 있었다. (이날 만족도가 상당히 높았지만 지크프리트의 브륀힐데를 듣고나니 드라마틱함에서 조금은 딸린다는 생각도 들고 있음. 2% 부족했던 부분이 잡힌다고 해야하나?)
보탄은 첫날 보탄 역을 맡은 가수도 좋았지만 이날의 보탄 역시 일관된 흐름. 처음에는 전날과 같은 캐스팅인가 잠시 잠깐 생각했을 정도로 스타일이나 소리도 상당히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훈딩은... ㅠ.ㅠ 늘 그렇듯 나를 잠재우는 목소리. 이건 누가 부르건 같은 결과인 것을 볼 때 이 가수의 잘못이 아니라 훈딩의 음역대와 노래가 내 수면을 자극하는 코드인 것 같다. 하지만 2막에서는 즐겁게 봤음. 베이스 가수들의 음정에 불안해하지 않고 노래를 듣는 것이 과연 얼마만인지. ㅎㅎ;
3막에서 가장 유명한, 사실 링 전체를 두고 봐도 가장 유명한 발퀴레 여신들의 등장. 히야토요~에서 다시 한번 혼자 행복해서 벙글벙글.
8명의 여신들의 그 역량이라니. 그들 중 아무나 하나 빼내어서 솔리스트를 시켜도 충분히 소화해내겠다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보탄이 브륀힐데에게 내린 처벌을 철회해달라는 그 탄원의 합창을 들을 때 다시 한번 내가 발퀴레를 정말로 보고 있구나 재확인하는 기분~
브륀힐데를 잠들게 하고 그 주변을 불꽃으로 감싸는 부분도 조명으로 표현하려나 했는데 불꽃 머리를 한 무용수들이 등장할 때는 마린스키 극장의 그 유명한 춤을 볼 수 있으려나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역시나 절제된 최소한의 움직임. 아이디어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역량이 되는 무용수들을 가졌다면 조금은 더 격렬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이날도 무대 전체는 전날 라인의 황금과 마찬가지로 거석 석상들을 연상시키는 세트와 조명이 모든 것을 표현한다. 게르기예프 링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을 하나 고르라면 주저없이 이 화려한 조명을 택할 것 같다.
예전에 색채에 관한 책을 하나 봤을 때 한 챕터에서 조명에 관한 얘기가 언급이 됐었다. 조명의 색깔에 따라 등장인물의 심리, 사건의 진행, 전체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는데 각각의 심리에 따라 사용하는 색깔들이 나와 있었다. 그 메뉴얼을 본다고 해야하나? 격렬한 대립과 반목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붉은색이나 어두운 조명. 불안한 심리에서의 보라톤. 짧은 행복이나 평온한 분위기에서의 초록이나 노랑의 조명들.
게르기예프는 연기는 극도로 절제를 시키면서 조명으로 많은 것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분은 지크프리트를 보면서 조금은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다.
강대한 힘을 지니고 초월적인, 그래서 절제되고 억압된 존재인 신들이기에 동작을 극소화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 인간인 지그문트와 지클린데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신들과 달리 감정 표현이나 동작이 컸고... 3부에서 지크프리트의 경우는 방방 뜨는 인간의 모습. 움직임의 폭으로 인간과 신의 차이점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날까지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지크프리트를 보면서 떠오른 단상 하나.
게르기예프나 무대 디자이너는 서구보다는 더 원류로 깊이 들어간 원시 신화와 동방의 느낌을 은근슬쩍 담지 않았나 싶다.
일단 배경으로 일관되게 등장하는 거인 석상들. 중앙 아시아 등을 중심으로 한 원시 신화 관련 유물에서 발견되는 거친 토우의 인상이 발견된다. 거기에 스톤 헨지와 같은 거석 유적의 느낌이 교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그리고 라인의 황금에서 마지막 장면. 발할라도 가면서 프리카는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행사에서 왕비가 썼던 헴헤메트관을 썼고 보탄은 죽음의 사자인 아누비스 머리를 관으로 썼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냥 예쁘거나 멋지다는 이유로 그 고대 이집트 코드를 갖다 끼우지는 않았을듯.
나중에 나올 얘기지만 지크프리트에서 등장하는 새의 의상도 확연한 중국풍.
신들의 황혼까지 다 보고 나면 이 코드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파악이 될까?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투덜 하나.
본래 공지와 달리 휴식 시간을 45분씩으로 잡아서 공연이 끝나니 거의 12시가 다 됐다. -_-;;; 주차장 빠져나오느라 거의 30분 소요. 집에 돌아온 시간이 1시가 넘었다. 우리야 다행히 차를 가져온 일행이 있었다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쩌라고? 역시 세종이란 욕이 다시 나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