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오빠에 대한 흥분은 가라앉히고 지젤 얘기만 간단히 하자면 1막은 평범, 2막은 세계 어디에 내어놔도 크게 빠질 게 없는 수준. 다들 보는 눈은 비슷한지 공연 끝나고 나오며 동행자들이 입을 모아 2막이 훨씬 더 멋지다. 2막을 위해 1막을 참았다는 표현들을... 참았다라... 1막이 그렇게나 많이 지겨웠었나? -_-;;;
1막에서 황혜민씨는 가냘프고 바람에 날려갈 것 같은 소녀 지젤의 모습과 분위기 그대로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좀 무겁다고 해야하나? 최상의 컨디션은 아닌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건 발굼치에 공기 쿳션을 단 것 같은 자하로바를 본 지 한달여밖에 안된 내 눈의 착각인지 몰라도 나폴나폴, 사뿐사뿐의 느낌이 별로 없었음. 하지만 1막 마지막의 광란의 연기는 오랜만에 지젤이 정말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감정 표현은 한 것 같다.
엄재용씨는... 1막이야 뭐 알브레히트의 무용수로서 능력을 대단하게 과시하는 부분이 없으니. 어쨌든 그의 신체조건 만큼은 서구인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 직전에 유럽에서 온갖 쭉쭉빵빵 오빠들을 섭렵해 눈이 마구 높아졌음에도 엄재용씨의 다리나 팔의 길이는 전혀 짧다는 느낌이 없다.
1막의 군무는 평소 UBC의 모습보다 조금 아래. 타이밍을 놓쳐 거슬리는 사람이 한번 눈에 들어오면 아무리 눈을 떼려해도 그쪽에 자꾸 신경이 집중된다. UBC 공연에서 군무때문에 신경쓰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어긋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영...
패전트 파드데도 UBC 지젤 패전트와 나의 악연을 다시 이어갔다. ㅠ.ㅠ 패전트 파드데를 춘 여자 무용수. 그동안 봤던 패전트 중에선 제일 덜 못했지만 그래도 레슨을 좀 더 받고 오면 좋을듯. 파드데 부분에선 그럭저럭이지만 솔로 부분에선 중심이 밀리고... 여하튼 정말로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 무용수. 이름도 확인했다. 진헌재씨. ^^ 어쩌면 그렇게 기분좋을 정도로 정확한 포즈를 취하는지. 엄재용씨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특히 마무리는 교본에 나오는 것 같다. 파트너를 보조하는 능력도 상당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음. 앞으로 UBC 공연 때 뭘 춤추나 잘 살펴봐야겠다.
2막은 황홀~
미르타를 춤춘 이성아씨. 정말 기가 막힌 부레부레 스텝에다 전체적으로 어쩌면 그렇게 가볍고 요기가 넘치는지.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는 미르타는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원한 가득한 정령의 분위기가 가득. 무대를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다. 악령이라기 보다는 요정 여왕 같았다.
윌리들의 안무도 만족~ 두 리드 윌리도 근래에 보기 드문 만족한 리드 윌리의 역할 수행했음. 이라고 생각하고 프로그램을 확인하니 주역급 무용수. 이름값이란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다.
2막에선 1막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벌충해주려는 듯 황혜민씨도 한결 가벼워진 움직임이다. 죽어서도 여전히 사랑을 지키려는 지젤의 가련함과 여린 감성이 그녀에게는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엄재용씨와 파트너쉽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는 타이밍과 움직임이다.
그녀도 현역 시절 완벽한 지젤을 보여줬던 문훈숙 단장처럼 지젤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화하려는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전인가... 김세연씨와 엄재용씨의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던 그 지젤의 아우라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김세연씨가 유럽으로 떠난 지금은 불가능한 조합이지만 UBC에서 가장 매력적인 무대는 엄재용씨와 김세연씨가 연출했었다. 두 사람이 함께 무대에 서면 정말 화려하고 흡인력이 강한 공연을 했는데... 황혜민씨도 나름의 장점과 특징이 있지만 엄재용씨와 상승 작용이란 점에선 늘 아쉬움이 남는다. 역시나 지금은 떠나고 없는 왕이씨와 더 파트너쉽이 좋았던 것 같다.
2막에서 엄재용씨. 예전에 김세연씨와 공연에서 보여줬던 그 엄청난 앙트르샤의 연속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 발레를 보는 내 동행자들에게서까지 자발적인 탄성과 박수를 끌어내는 엄청난 도약 -그럼에도 깔끔하고 무리가 없다는데 더 점수를 주고 싶다- 과 앙트르샤. 객석이 다들 난리였다.
사람마다 취향이 있고 기준이 있겠지만 내가 본 중에서 알브레히트의 바리에이션을 가장 잘 하는 발레리노 중 하나가 엄재용인 것 같다. 마카로바와 지젤 영상물에서 바리시니코프의 바리에이션을 실제로 본다면 몰라도 기교나 높이, 분위기 등등 전체적인 조합에서 이 정도로 매력적인 것은 실제로 보지 못했다.
엄청난 신장을 경이적으로 움직이는 우바로프의 알브레히트도 정말 감탄하고 좋아하긴 했지만 짜릿함의 강도를 따지면 엄재용씨의 이것보다 조금 아래였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힐라리온도 나름대로 존재감있는 모습을 1막과 2막에서 계속 보여줘서 누구지? 하고 궁금해했는데 서라벌씨였다. 역시~ 얼마전 볼쇼이의 지젤과 비교되는 것을 이건 당연한 일이지 의식했는지 주연급 무용수들 거의 모두를 전진배치한 초 호화 캐스팅이다. 그런데 김창기씨의 이름이 어디에도 안보여 조금은 서운. 부상인가???
일요일에 임혜경, 이원국 커플의 공연을 한번 더 본다. 그런데... 주연을 제외한 솔리스트는 다 오늘과 같은 캐스팅. 이왕이면 다른 솔리스트들의 춤도 보고 싶었는데 아쉽긴 하다. 그리고 제발 그날은 패전트 파드데에서 여성 무용수가 춤을 좀 제대로 춰주길.
마지막으로 오케스트라 얘기 한마디만. 지젤은 시립교향악단이 했다. 코심보다 대단히 엄청나게 잘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들어줄만한 사운드. 튀지 않아도 될 악기 소리가 튀어나오는 등 밸런스에선 좀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삑사리 거의 안내고 박자 흔들리지 않으면서, 더구나 무용수들을 방해하지 않고 반주해준 것만 해도 어딘지. 지난 볼쇼이 공연 이후 반주에 대한 눈높이가 엄청 낮아진 것 같다. 유럽에서 귀를 다 털어냈는데도 회복이 되지 않고 있음. -_-;;; 그런데 지휘는 또 다시 그 파벨 어쩌고 아저씨. 딱히 잘 하는 것 같지도 않구만 왜 자꾸 데려오는지. 돈이 싼가?
올해 공연은 이걸로 접으려고 하는데 UBC의 내년 레퍼토리가 궁금하군. 국립도 좀 재밌는 걸 올려주려나?
참!!! 오랜만에 올렉 비노그라도프가 나와서 무대인사. ^^ 전설을 눈 앞에서 봤다는 점에서 어제 공연에 다시 만족.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