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밀라노로 떠나는 날인데, 비행기가 루프트한자라는 걸 믿고 (알리딸리아였으면 감히 못 했음) 간 크게도 이날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열리는 발레 공연을 예매해놓았는데.... 정말 파란만장이었다. 공연 늦을까봐 어찌나 신경을 썼는지 다음날에는 몸살이 나서 완전 골골거리고 비몽사몽으로 돌아다녔다.
비행기는 루트프한자답게 정시에 칼같이 도착을 했다. 문제는 하필 이날 이태리 애들이 파업을 했다는 것. 떠나기 전에 이날 철도 파업이 있다는 걸 파업 공지 사이트에서 확인을 했기 때문에 말펜사 익스프레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건 포기하고 공항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 버스라는 게 시간이 됐다고 떠나는 게 아니라 손님이 다 차서 꽉꽉 차야지 떠난다는 거다. -_-+++++
버스만 제 시간에 떠났으면 그럭저럭 무리없이 도착인데 무슨 시골 시외버스도 아니고 자리가 다 찰 때까지 30분 이상 기다려서 겨우겨우 채우고는 출발. 그런데 시내 다 가서 이제는 길이 막히기 시작한다. 밀라노는 도시가 작기 때문에 이렇게 막히는 일이 별로 없는데 뭔 일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택시기사에 듣고 보니까 이날 철도 뿐 아니라 전철과 버스까지도 파업에 들어갔다고 함. 그나마 공항버스는 노조가 달라서 파업을 하지 않은 걸 감사해야겠지만 여하튼 당시엔 욕 나왔음.
이렇게 우여곡절을 다 겪고 공항버스의 종착역인 첸뜨랄레(=중앙역)에 나렸더니 밀라노는 비가 부슬부슬 오는 중. 파리는 화창해서 우산을 별 생각 없이 수트케이스 깊이 넣어둔 바람에 5유로 버리고 우산을 샀다. ㅠ.ㅠ
동행자에게는 철판을 깔고 내 짐과 함께 걔는 숙소로 보내고 나는 따로 택시를 타고 그야말로 날아왔는데 도착 시간이 6시 40분. 헐레벌떡 표 찾아서 입구로 오니 공연은 8시(그때까지 난 파리에서처럼 공연이 7시라고 생각하고 있었음. ㅎㅎ;) 고 라 스칼라 안에서 특별 행사중이라고 쫓겨나서 7시 15분이 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공연 포스터.
라 스칼라 홈피의 이태리어 버전으로 들어갔을 때 저게 뭔 공연이냐? 한참을 고민했다. ㅋㅋ 영어 버전으로 들어가서야 돈키호테라는 걸 알았음.
입구와 로비 사이의 복도 같은 공간에서 기다리면서 한 커트 찍어봤다.
여기서 다들 불쌍하게 안에서 열리는 행사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음.
그런데 입구의 안내원이 quarter fast seven에 공연 관람객들을 위해 문 연다고 그때 오라고 하던데... 중학교 때 영어로 시간 말하고 읽는 법 처음 배우던 때 말고 quarter fast 라는 표현을 실제로 쓰는 걸 정말 처음 들었다. 좀 창피한 얘기지만 잠깐 동안 이게 7시 15분 전이던가, 7시 15분이던가? 고민했었음. ㅋㅋ
잠시 바깥에 나와서 건너편 광장을 찍음.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가운데에 우뚝 선 사람이 다빈치고 그의 네 제자들이 귀퉁이에 서있다.
그 주변을 둘러싼 달팽이들은 전에 없었는데 무슨 설치 미술인 모양.
이렇게 빈둥거리다가 7시 15분에 드디어 라 스칼라 입성. ^^ 무슨 베니스의 가면 무도회에나 어울릴 것 같은 검은 망또를 두른 안내원들이 표를 검사하고 자리를 찾아주는데 한국 사람이 입으면 웃겼겠지만 얘네들한테는 꽤 잘 어울리고 분위기가 있어 보였다.
라 스칼라는 공식적으로는 촬영 금지지만 객석에서는 다들 찍는 분위기. 안내원들도 제지를 안 하고 너도 나도 다 찍는 분위기라서 나도 몇장 찍어봤다. (그런데 공연 중간에 플래시를 터뜨리는 무개념들이 있었음! 도대체 누구냣!!!!!!!)
1층 객석을 제외하고는 모든 좌석이 저렇게 박스로 되어있다.
이 라 스칼라가 처음 지어졌던 시절에는 저 위층 박스들은 돈 좀 있거나 행세하는 사람들이 연중 임대를 해서 우아하게 관람하고 아래 1층은 천 것들이 차지했는데 시대가 바뀌어서 이젠 1층이 제일 비싼 자리가 되어버렸으니... 이거야 말로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된다는 얘기?
그런데 라 스칼라는 좌석간 높이가 너무 낮다.
바로 앞에 -발레를 처음 본다던 동양남자. 아마도 옆에 앉은 이태리 남자가 접대용으로 모시고 온 듯한- 남경주급이 앉았는데 예당이었다면 B급 재난이 라 스칼라에서는 강호동이나 최홍만에 버금가는 특A급 재앙이 되어 있어서 머리를 복도로 내밀고 보느라 목이 아팠다. -_-;
돈도 많이 들여서 몇년에 거쳐 고쳤다면서 이건 쫌. 다음에 라 스칼라에 올일이 있을 때는 제일 앞 줄이 아니라면 필히 박스석을 예약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화려한 붉은 무대막과 천장.
이태리는 다른 곳도 그렇고 금칠을 엄청 좋아하는 것 같다.
약간 어두운 조명의 고풍스런 분위기의 가르니에나 빈 슈타츠오퍼와 달리 라 스칼라는 엄청 화려하고 화사하다.
베르디와 푸치니가 살았던 곳이고 그들의 음악을 가장 먼저 듣고 즐겼던 장소. 여기선 베르디의 리골레토나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들어줘야 제격이지만 공연일정이 안 맞으니 하는 수 없고... 그렇지만 누레예프 안무의 돈 키호테도 감동의 물결이었다.
밀라노의 프리마돈나 카를라 프라치와 파트너를 이뤄서 밀라노에서 공연을 자주 해서 그런지 라 스칼라에는 누레예프의 흔적이 꽤 많다. 그리고 이 발레단의 레퍼토리의 상당수가 누레예프 안무작이기도 하고. 덕분에 돈키호테 안무 중에 가장 화려하고 박진감이 넘친다는 누레예프 버전을 현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젊은 스타 사라파노프와 오시포바 커플로 봤으니 내게는 감사할 따름.
백조의 호수마저도 지크프리드 왕자의 행복한 모험으로 바꿔놓는 능력자(?)다 보니 돈키호테나 코펠리아, 빗나간 딸 류의 가벼운 발레가 딱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정말 그대로다.
1막은 정말 환타스틱 그 자체. 몇년 전 제 1회 서울 국제 발레 콩쿨에서 그야말로 발군이던, 그렇지만 아직 조금은 덜 다듬어지고 풋풋하던 사라파노프의 돈키호테 3막 그랑 파드데를 봤을 때 이 친구는 제대로 자라면 정말 크게 되겠구나 했는데 그 예상이 맞아 떨어진 현장을 보니 정말 뿌듯하다.
오시포바도 정말 명불허전. 사라파노프도 그 존재감이 만만치않은 발레리노인데 둘이 같은 힘으로 부딪힐 때 사라파노프가 밀려 보일 때가 있다. 남녀 무용수의 불꽃 튀는 무대도 멋지지만 무게추가 기울어야 한다면 여성쪽이 강한 게 훨씬 보기가 좋은데 정말 이상적인 결합.
정말 둘 다 무시무시한 속도감을 자랑한다. 특히 3막 마지막 피날레에서는 지휘자와 이 커플이 작정을 하고 '인간이 얼마나 빠르게 춤출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보여주겠다!'는 식의 속도로 움직이는데.... 옛날에 마야 플리세츠카야의 백조의 호수 비디오를 보면서 테이프를 잘못 감은게 아닌가 잠시 고민했던 그 이후 처음 만나는 무시무시한 무대.
무용수들도 대단하지만 이런 반주를 하는, 늦추었다 빨랐다는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게 정말 감동이다. 오늘 무댄 두 주연 무용수의 기량이 워낙 탁월하니 예외로 치고, 한국 발레단의 공연도 제대로만 하면 해외 유명 발레단이 어설프게 하는 공연보다 나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문제는 늘 오케스트라. 차라리 녹음 반주를 해달라고 빌고싶을 정도로 깨는 반주 때문에 늘 감흥을 망쳤는데 라 스칼라의 반주는 정말 브라보 백만번. 그래도 한번 놀았던 물이라서 기억나는 오케스트라 코드를 따라가보는데 손가락이 꼬이는 건 둘째 치고 관악기는 혀가 꼬이는 속도인데 어떻게 무너지는 음이 하나도 없는지. 이건 전직 동업자였기에 더 감탄사가 나왔음.
지휘자가 여자인데 그랑 파드데의 바리에이션을 제외하고는 박수칠 틈도 주지않고 칼같이 죽죽 끌어간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므라빈스키를 연상시키는 그 파워와 속도감은 이태리스럽지 않은 듯 하면서도 또 뭔가 이태리스러운 그 묘한 색채가 어우러진... 아직은 뭐라고 딱 떠오르는 단어가 없는 특이한 지휘와 음악 해석이었다. 지휘할 때 액션이 엄청 크던데 체력이 엄청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했음.
재작년에 본 ABT 공연에서 스티펠은 힘을 모았다가 3막에서 화끈하게 터뜨려주는데 1,2막에서 워낙 힘을 다 쏟아내서 그런지 아니면 그 대비의 효과가 적어서 그런지 3막에서 사라파노프는 기대했던 것만큼 화끈한 테크닉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또 익살스런 연기력도 스티펠보다 한수 아래- 그래도 속도감으로 커버. 오시포바는 3막 바리에이션에서 부채를 떨어뜨리는 사고가 있었는데 능청스럽게 커버를 잘 했다. 돈키호테 발레를 보면서 부채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길지 않은 내 발레 감상 일생에서 부채 떨어뜨리는 사고가 이게 두번째인데... 내가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ㅎㅎ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베테랑 에뜨왈들의 완급조절이 있는 무대도 좋지만 그래도 풋풋함을 벗고 전성기에 들어간 젊은 무용수들의 힘을 아끼지 않는 아우라는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들인 엄청난 돈과 노력 공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전성기가 길지 않은 발레에 있어서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고 더구나 변방에 사는 나로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순간인데 그 물 오른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는 건 정말 감사하고 두고두고 내 추억 바구니에 담아두고 즐길 순간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 찍은 사진들~
뛰어난 남자 무용수가 안무가로 전업할 경우 그의 작품에는 남자 무용수의 능력이 강조되는 역할이 생기거나 남자 무용수의 롤이 크게 강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누레예프 버전은 그 완벽한 예.
2막에 추가된 집시 대장의 솔로는 진짜 박력있고 멋졌다.
오시포바와 사라파노프.
댁들의 코펠리아나 말괄량이 딸을 볼 날이 오면 좋겠소~
등장하신 지휘자 아줌마.
내 평생 이렇게 얼굴이 네모난 사람은 정말 처음 봤다. ^^;
그러나 다른 잡생각이 싹 달아나는 지휘를 보여줬음.
지휘계도 그렇고 이태리도 상당히 보수적인데 이 양대 보수의 세계에서 여자가 라 스칼라의 상임 지휘자 자리를 꿰찼다면 어느 정도 노력과 실력이 있을지는 설명이 불필요할듯.
모든 사람들이 정말 진심으로 미친듯이 박수를 보냈다.
이 동영상에서도 그림자를 드리우는 머리와 손으로 등장하는, 발레를 처음 본다던 내 앞자리의 A급 재앙은 첫 공연을 테이프를 이렇게 끊어놨으니 앞으로 어지간한 공연은 눈에 차지도 않을 텐데... 부러운 동시에 또 쬐끔은 걱정이 되기도 함. (뭔 쓸데없는? ㅋㅋ)
이틀 전에 바스티유 오페라의 돈 카를로도 그렇게 이것도 그렇고. 브라보와 박수갈채를 받을 가치가 충분한 때 쏟아지는 브라보에는 진심으로 동의, 동감한다. 좀 옆으로 새는 얘기인데, 한국은 진정으로 박수받을 가치가 있는 무용수마저도 뻘쭘하게 만드는 그 브라보 남발을 어떻게 좀 해결해야 함. 국립 발레단의 차이코프스키를 볼 때, 아마 한예종 학생들도 짐작되는 그 아해들의 브라보는 정말 민망했다. -_-;
그리고 프로그램을 보니까 볼쇼이의 프린시펄이던 자하로바가 라 스칼라의 프린시펄로 이름을 떡 올리고 있었다. 자하로바가 라 스칼라로 이적한 건 몰랐네. 알았다고 해도 이번 공연은 절대적으로 사라파노프와 오시포바의 공연을 봤겠지만. 4월에 자하로바가 라 바야데르를 한다고 하던데... ㅠ.ㅠ
여하튼 이 공연 하나만으로도 먼 유럽까지 날아간 보람이 있었다. 이 공연 예매한 티켓값이 3월 초에 나올 텐데 그 카드비를 갚기 위해서 열심히 수금 독촉을 해야 함. -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