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가 정권 이전에 우리 모두가 얼마나 낙관적이었는지, 우리가 이제는 민주화된 사회를 정착시켰다는 행복한 착각을 품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인터뷰. 지금 다시 보니 마음이 아프다.
010020 등단 후 시를 쓰지 않고 시골에서 10년간 살게 된 이유
010040 특별한 이유라기보다는 서울서 여러 가지 살기도 어렵고 그리고 그 무렵 상황이 복잡할 때죠. 여러 선배들 가운데서 여럿이 구속되었던 사건도 있고 해서 서울서는 참 살기가 어렵구나, 그래서 시골 가서 몇 년 산다고 내려간 것이 결국 10년 가깝게 채워서 살게 됐죠.
0115 농무의 사회적 배경
0122 그때 인제 시골 가서..NG
0134 시골 가서 한 십년 살고 나서 여러 가지 일을 해봤죠. 가령 학원 강사도 하고 아이들 개인지도도 하고, 그리고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여러 가지 법에 저촉되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세상을 다시 공부를 했다고 할까,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하던 세상을 알게 됐죠. 0202 그래서 아 우리가 이러한 형편에서 살고 있구나, 그런 것을 느끼면서 그러한 현실을 시 속에 시로서 형상화하지 않으면 정말로 감동을 주는 시, 제대로 된 시는 쓸 수가 없겠구나 생각을 했죠. 0224 또 한 가지 시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은 시라는 것이 어차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사회에 대한 질문이고 대답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농무 속의 시를 다 썼던 건 아니고 몇 편은 그 때 썼지만 머리 속에 답아 놨다가 서울 와서 시작활동을 할 때 작품으로 형상화를 했던 거죠.
0249 질문
0258 그때는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가 아마 소득이 삼천 사백달러 그렇게 밖에 안될 때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절망감 같은 것, 우리가 앞으로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고 제대로 된 삶을 이룩해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다 절망적이었죠. 우리 나라는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그런 절망 속에서 살던 시절이었고.
0332 또 독재가 아주 극심해가지고 정부에 대한 비판 같은 거 사회에 대한 비판 같은 건 일절 허용되지 않았어요. 조금만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려서 잡혀가고, 막걸리 마시고 몇 마디 불평했다고 잡혀가서 빨갱이로 몰리고 그런 시절이니까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되죠. 그때에 비하면 지금 이렇게 된 것이 기적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어요.
0410 내가 시골 돌아다니면서 농무를 쓰면서 앞으로 내가 좋은 세상에서 살기는 틀렸다. 앞으로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상황에서도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일단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인권이니 뭐 그런 건 있지도 않았고 부정부패,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정부패, 가령 그때는 호적을 때거나 주민등록등본을 땐다고 해도 다 관청에서 때는데 땔 떼 담배 한 갑 안사주면 땔 수 없었어요. 줄 서서 때는 데 담배 한 갑을 사주면 저 밑에 있던 게 위로 올라와서 먼저 처리를 해주고. 의례, 조그만 부탁을 하더라도 점심 한 그릇은 사줘야 되고.
0504 그땐 공무원들이 월급이라는 게 거의 없었으니까.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잘 안되서 진짜 그런 세월을 거쳐왔나 싶고.
0525 여름 되면 홍수, 겨울 되면 연탄 가스 새서 사람들이 죽고, 봄이면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고.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거죠.
0542 질문
0557 민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산업화로 접어들었을 때죠. 그러면서 우리사회는 우리 문화가 거의 없어져가는 통째로 없어지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아 민요의 정신을 시 속에서 되살려서 하는 것이 우리 문화를 보존하는 길이고, 또한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길이 되겠구나 하면서 민요 가락으로 시를 썼는데 일부 목계장터라던가 그런 시는 스스로 좀 만족스럽게 생각하지만 또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못하는 시가 많아요. 민요라는 것은 한 시대 전의 정서기 때문에 확실히 오늘의 정서와 접목 시키기가 쉬운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이죠. 우리가 그러나 민요의 정신이나 가락 같은 것을 그대로 원용할 수 없지만 그 정서, 정신 같은 것은 시 속에 녹아들어 있지 않을까 지금도 내 시 속에 민요적인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0723 ‘가난한 사랑의 노래’ 시의 창작 배경
0732 그것이 아마 87년, 88년 무렵에 썼어요. 그때가 인제 우리 나라가 민주화 운동 진통할 때고, 사회가 크게 홍역을 앓고 있을 때죠. 그때 바로 여기 근처 저 쪽에 살았는데 그때 자유당 술집이 있었어요. 거기서 한 노동자를 알게 됐는데, 그 때 그 노동자가 지명수배를 당해서 도망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해요. 애인도 데리고 오고, 결혼 할 것인가 어떨 것인가, 그 때 내가 주제넘게 결혼을 해라, 결혼을 하면 내가 주례도 서주고 축시도 한편 써주겠다. 그래서 썼던 것이 가난한 사랑 노래고, 또 그 시집 속에 들어가 있는 너의 사랑이라는 시가 하나 있어요. 너의 사랑은 원래 썼던 시인데 결혼식도 조그만 지하실에서 10여명이 모여서 했고, 거기서 내가 주례를 서면서 너의 사랑이라는 시를 읽어줬고 그때 기분이 너무 좋아가지고 그 뒤에 가난한 사랑 노래까지 썼던 거죠. 뭐 그때 당시의 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굉장히 좋아했죠. 그래서 그건 지금도 상당히 즐거운 추억입니다.
0908 질문
0913 물론 시라는 것이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이고 한 두마디로 시란 어떤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지만 군부 독재 시대에는 우리 삶이란게 너무 참 살기 어려워서 내 생각에는 시라는 것이 군부독재와 싸우는 데 무기가 되고, 총탄만 무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도 무기가 될 수 있다, 라고 생각을 했고요.
0943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시라는 것은 추구하는게 있죠. 삶의 다양한 모습을 시 속에서 들어내고 그럴 때 감동을 느끼는 거지만 또 이 시라는 것이 논리를 가지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정서로 설득, 호소하는 것인데 시라는 것은 한편 그 사회가 가진 여러 문제에 대한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하고, 그런 면에서 시의 진짜 재미를 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시를 썼고, 그 군부독재 시대나 박정희 시대에 우리 시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군부 독재, 유신 독재와 싸우는데 크게 한 몫을 한 것은 사실이죠.
1037 질문
1045 일제시대에도 우리 시인들은 일제와 맞서 싸우는 정서를 많이 표현한 사람들이 많았죠. 군부 독재 때도 마찬가지고.
1103 질문
1114 글쎄, 그때 내가 거기는 중심부가 아니었으니까... 별로 이야기가...문인들이라는 게 뭐, 문인들이라는게 한군데서 모여서 놀고 그러는 건 정말 옛날 이야기고, 70년대만 해도 특별히 문인들이 모이는데가 없었죠. 그냥 관철동 시대라고 이름을 자꾸 부치는데, 거기 모이는 문인들은 소수였고, 관철동 시대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1159 질문
1207 글쎄 젊은 시인들도 아주 다양하고 지금 시가 옛날보다 더 여러 형태의 시들이 있기 때문에 한 두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난잡한 시들이 많다, 사실 시가 독자들에게 외면당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 외면 당한다는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그 일부 원인은 시가 너무 어려워가지고 독자가 접근할 수 없다는 면도 없지가 않죠. 젊은 시인들이 독자들이 자기 시를 안 읽어준다고 그런 말만 할게 아니고, 나도 이해하고, 남도 이야기하고 다들 이해하는, 어떤 시는 자기도 이해 못 하고 남도 이해 못하는 그런 시가 많으니까 자기도 알고 남도 아는 그런 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1307 물론 좋은 시인들은 젊은 시인 중에서도 많아요. 많지만 또 요즘 시의 문제점은 시를 조금만 읽으면 다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있거든. 독자처럼 시인이 되는거. 모든 독자의 시인화, 이런 건 좀 문제가 있죠. 꼭 시는 자기가 스스로 써서 만족하는 경우도 있지만 또 읽어서 만족하는 것도 있으니까 그런 쪽도 좋겠죠.
1341 그러니까 젊은 시인들도 좋은 시인들이 많아요. 옛날보다 표현방법도 다양하고 화려하고 또 생각도 깊고 그런 사람들도 많지만 부족한 친구들도 있고.
1400 질문
1415 광복에서 419까지가 이제 말하자면...
1433 아주 가난했던 시절이죠. 그때 눈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굉장히 가난했다는 것,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때 대통령 후보들은 후보 연설하기를 자기는 대통령이 되면 미국서 원조를 많이 받아다가 국민을 먹여살리겠다고 하면 먹히던 시절이니까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죠.
1502 아무 것도 없고 가난하고 우리가 차를 하나 만들 수 있나, 뭐 물건도 만들지 못하고 그때는 엽전이라는 말이 유행했어요. 뭘 만들어도 하도 물건이 허술하니까, 엽전이 뭐 할 수 있나, 그런 열등감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말들이 사라졌잖아요. 그때 하여튼 아주 가난하고 아무 것도 없던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1545 가난이 극복되면서 우리 사회가 경제 개발을 시작했잖아요? 그러니까 경제 개발 시대면서 또한 산업화 시대이고 또 한편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힌 시절이고. 인권탄압의 시대. 이 두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산업화와 인권 탄압이 동시에 진행된 시절이라고.
1605 그때는 하여튼 감옥에 가보면 술 먹고 정부에 대해서 불평하다가 빨갱이가 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어요. 그 사람들은 아무 의식도 없이 그래가지고서 막걸리 반공법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막걸리 반공법이 진짜 있었던 게 아니고 막걸리 먹고 반공법에 걸린 사람들. 지서 옆 구멍가게 주인이 지서 순경들한테 이놈들 아주 고약한 놈들이라고 그래서 빨갱이로 몰려서 잡혀가고, 외상값 안갚는다고 소리치다가 반공법 위반이라고... 그러니까 하여튼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힌 시대고, 한편으로는 그러나 이면으로 경제 성장이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우리가 가난에서 벗어난 시절이었죠.
5609 질문
1658 그 뒤에는 우리가 그 두가지를 다 이룩했죠. 민주화하고 경제 개발, 경제 발전도 이룩했고. 우리가 다른 나라, 외국에 가니까 요새 신문만 보면 우리 나라가 망한 것처럼 떠들어 되는데 외국서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로 한국을 쳐요. 어느 나라든.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경제 발전도 이룩했고 또 민주화를 이룩했다는거지. 지금 우리나라처럼 자유스럽게 떠들 수 있는 나라가 이 세계에서 그렇게 많지 않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보다도 더 민주화가 발전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현실은 김근태 의원이 활약했던 민청련 기관지 창간호에 신경림 시인이 이 시를 써보내던 그 시절과 흡사한 상황.
아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불길을 헤치고 물 속을 헤엄치고
가시밭 돌무덤 바위산을 뚫고서
모두들 여기까지 달려왔구나
온 나라에 울려퍼지는
노래 크게 외쳐 부르면서
등에는 깊은 이빨자국
이마와 손바닥엔 아직 피 붉은 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끝내 흔들리지 않을 깃발
저 하늘 높이 세우기 위하여
철창에 뜨는 달 먼 산에 피는
아지랭이에 한숨쉬기도 했지만
모두들 주먹 다시 부르쥐는구나
어둠 이 땅 구석구석에서 몰아낼
큰 횃불 드놓아 밝히리라고
이제 우리 갈 길을 알았노라고
이웃과 함께 친구와 함께
갈가리 찢긴 이 땅덩어리와 함께
밟히고 꺾이고 으깨어져
조그맣게 움츠러든 이 겨레와 함께
이제 갈 길을 알았노라고
아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모두들 손에 손잡고 섰구나
저 강 건너 동녘을 향하여
새 햇살 새 별빛 아직 멀어도
잃을 것이 없는 자에겐 두려움이
없으니 망설임도 없으니
손과 발에 매인 사슬 끊어 던져라
아양과 눈웃음에 우린 속지 않는다
모두들 힘차게 달려가는구나
육천만 온 겨레 얼싸안고서
어깨동무하고 나갈 북소리 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