갔다온 날 바로 감상을 올렸어야 하는데 피곤하고 어쩌고 하면서 벌써 화요일이 됐다.
더 미루면 아예 안 쓸 것 같아서 지금 끄적.
올해 가장 기다렸던 공연 중 하나로 순위를 꼽으라면 1위다.
공연표는 외국에 나가지 않는 한 가능한 만원대에서 끊는데 이건 10만원대를 넘어서 간만에 예당 2층에 앉았는데, 그날 일행들과도 얘기했지만 얼마만에 2층인지 기억도 안 난다. ㅎㅎ
유료회원 예매 때 시간 맞춰 들어가 땡~하고 예매를 했음에도 1순위 자리는 놓치고 2순위를 잡았지만 그래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공연은 기대했던 딱 그 정도.
나름 오랜 기간에 걸쳐 능력껏 최선을 다 해 좋은 공연을 챙겨보다보면 생기는 부작용이 어지간한 수준의 무대에는 감동이 쉽게 오지 않는다.
마약중독자가 더 센 마약을 찾게 되듯 어쩔 수 없이 과거의 기억에 비교를 하면서 그것보다 더 나은 자극과 흥분을 원하게 되는게 인간으로서 본능이라 그전이라면 감격의 도가니였을 공연도 괜찮네~ 정도로 시크하게 됨.
슬프다면 슬픈 무뎌짐이겠지만... 그래도 한번씩 그걸 뛰어넘는 순간이 있으니까 이렇게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계속 좋은 공연을 찾아다니고 있는 거겠지.
각설하고, 바랐던 감동의 무대가진 아니지만 충분히 몰입하고 즐길 수 있는 무대였다.
가장 큰 요인은 강수진이라는 무용수의 역할.
만화나 소설에서 예술가를 묘사할 때 '무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를 바꾸고 모두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그(혹은 그녀)에게 향한다'는 표현을 그림이나 글로 묘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실제로 강수진은 그렇다.
공연은 그녀가 무대에 있을 때와 없을 때. 딱 두가지로 나뉜다.
안무가가 왜 강수진이 반드시 주연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작품을 안무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안무가가 추구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무용수와의 시너지는 꽤나 극적인 효과를 냈고 40대 후반의 발레리나는 15살 초초상을 정확하게 구현해냈다.
하지만... 문제는 강수진을 제외한 그 누구도 초초상에 대입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향후 이 작품이 얼마나 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조금은 걱정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내년 3월에 국립발레단 정기공연에 이 나비부인을 공연하고 안무가가 직접 그때 주역무용수를 위한 오디션을 실시한다고(했다고?) 하는데 과연 누구일까?
김지영 등 수석무용수들의 이름이 떠오르긴 하지만 이미지가 잘 대입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년에 보러 갈지는 솔직히 좀 의문. ^^;
강수진을 떼어놓고 안무와 음악에 대한 느낌을 정리하자면, 안무가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푸치니의 그 유명한 오페라 음악을 다 쓰고 싶었을 텐데 딱 포인트가 되는 곡을 제외하고는 다른 유명한 곡들과 북을 중심으로 한 타악기들, 가끔 관악기들이 등장해 반주를 담당한다.
그런데 타악기들의 그 절묘한 어우러짐은 마치 멜로디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할 정도로 리드미컬하면서도 적절하게 밀고 당김을 해주고 있다.
움직임과 음악이 착착 잘 맞아떨어지는 걸 보는 즐거움이랄까.
안무상으로는... 들고나는 동선을 더 간결하고 줄이고 전환 때 좀 더 빠르게 몰아치면서 숨쉴틈 없이 진행되면 어떨까, 그럼 더 극적인 클라이막스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각자의 취향이고 안무가 나름의 의도가 있을 테니 그냥 내 개인 의견으로 끄적,
무대도 화려하고 이국적인 일본풍을 최대한 절제하고 젠 스타일의 미니멀리즘으로 단순화해서 굉장히 고급스러우면서도 정말로 일본스럽다.
타국인의 시각에서 이런 수준의 자기 문화 재해석을 받을 수 있는 일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궁시렁궁시렁 잔소리가 많았는데 강수진의 나비부인은 좋은 공연이었고 이 공연을 본 게 가문의 영광까진 아니지만 충분히 행복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