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통때문에 주말에 끝내야하는 마감은 손도 못대고 계속 책만 읽고 있다. ㅠ.ㅠ
오늘도 전혀 나아진 건 없지만 오늘은 일을 하다 죽는 한이 있어도 끝내야 하는 그야말로 데드라인인 고로 오늘 새벽에 읽은 책 포스팅으로 워밍업.
이름만으로 망설임없이 사재기를 하는 저자가 내게 두어명 있는데 그중 하나가 콘라드 로렌츠이다.
이 책은 꽤 오래 전에 나왔다가 품절내지 절판이라 구하지 못하다가 예스 24에 재고가 있는 것을 보고 잽싸게 구매.
개와 인간이 어떻게 만나서 친구가 되고 가축화되었는지 과정을 로렌츠 자신의 연구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눈앞에 보이듯 펼쳐놓는 것이 책의 시작.
그리고 그의 많은 책들이 그렇듯 그가 함께 살았던 개들에 대한 기억, 그들과의 경험을 통한 학문적인 얘기들이 이어진다.
어릴 때부터 개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키웠던 개들과의 추억을 더듬으며 읽는 재미와 감동, 또 새로운 깨달음이 쏠쏠하다.
상대에게 해를 끼치진 않지만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에 대해선 확실한 위협으로 응징했던 쭈삐 1세. 그 개 덕분에 우리 집을 반경으로 내가 움직이던 골목 세군데의 어느 누구도 나를 해코지 못했다. 그때는 아무 생각없었지만 로렌츠의 사촌이 키우던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면 어지간한 담력으론 게기지 못했겠지. 로렌츠의 이론에 대입하면 쭈삐 1세는 나를 돌봐야할 무리의 어린 일원(-_-;;;) 내지 약한 동료로 취급했던 것 같다. 내가 어지간히 쭈물럭거리고 귀찮게 굴었는데도 내게는 으르렁거렸던 기억조차 없다.
그러나 외부 사람들에겐 엄청나게 사나워서 좀도둑이 횡횡하던 그 시절. 골목의 거의 모든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도 우리 집엔 도둑이 안 들었음. 모친 말씀으론 동네에 도둑든 날에는 쭈삐가 눈에 불을 번쩍번쩍하면서 밤새도록 난리를 치면서 짖었다고 한 기억이 난다.
이렇게 충성스러웠건만.... 이모부의 보신탕이 된 쭈삐를 지켜주지 못했던 기억은 아직도 내게 가슴 아픈 상처다. ㅠ.ㅠ 왜 좀 더 강력하게 버티지를 못했을까....
쭈삐 2세는 암놈이었는데... 얘랑은 솔직히 별로 정이 없었음. 늑대의 피가 짙은 지나치게 독립적인 개였는지 아니면 나를 무지하게 귀찮아했고 물지는 않았지만 으르렁거리긴 다반사. 아파트로 다시 이사오면서 떠날 때 얘랑 헤어지는 건 아쉬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얘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려보면... 토종 누렁이인 쭈삐 1세와 달리... 그렇게 마당을 지킬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음. 곱슬거리는 까만털이었다. 까만 푸들내지 그 잡종이었겠지.
동물의 속임수에 관한 로렌츠의 고찰을 보면서는 뽀삐 1세를 떠올렸음. 걔는 충성스러운만큼 또 상당히 성깔도 있으셨다. 가끔 참지 못하고 '으르렁'하고 반항을 하는데 그때 콱 째려보면 목소리가 아주 부드럽게 '가르릉... 가르릉..'하고 애교떠는 걸로 바뀐다. 그 시치미 딱 떼는 표정이라니. '좀 전에 그 으르렁은 네가 잘 못 들은 거야. 내가 하려던 건 바로 이런 가르릉이었어~' 하는 어투. ㅋㅋ
그러나 주인에게 가끔 상처입히는 것에 대해서 잠깐 미안해하긴 했어도 로렌츠의 개처럼 심각한 양심의 가책은 안받은 것 같다. 대신 원한은 반나절 이상 기억하는 기염을 통했다. -_-;;; 로렌츠가 뽀삐 1세를 키웠으면 그의 연구에 상당한 보탬이 됐을 듯.
언어 능력도... 정확한 시간까진 파악 못해도 '나중에'나 '내일' 이라는 단어가 미래형을 의미한다는 건 명확하게 인식했었다. 그건 장담을 하는 게 '가자' 라는 단어가 나오면 좋아서 발광을 하다가 '내일 가자' 혹은 '나중에 가자' 라고 하면 갑자기 김이 팍 샌 얼굴로 날뛰는 것을 멈췄음. 얘의 언어 이해 능력은 어지간한 4-5살 아이보다 훨씬 나았는데. 얘를 보면서 동물이 오래 살면 요물이 된다는 옛말의 의미를 실감했었다. ^^
로렌츠 자신도 실험실 동물의 언어반응 실험이 한계가 있다고 인정했는데... 실제로 로렌츠가 키우고 만났던 개들보다 더 지적 수준이 높은 개들은 많은 것 같다. 뽀삐 1세만 놓고 봐도 로렌츠의 책에 나온 애들보다 충성심이나 선함의 강도는 떨어져도 똑똑한 것만큼은 확실히 더 했음.
그렇게 보면 똑똑해질수록 충성도가 떨어지는 걸까???
똑똑하고 독립심 강했던 뽀삐 1세와 달리 뽀삐 2세는 완전 아기. -_-;;;
인간 가족이란 무리 안에 서열 마지막에 위치한 개는 어느 정도로는 영원히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데 얘는 그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 같다.
주변에서 들리는 일반적인 개의 수준과 비교해볼 때 떨어지는 것 같진 않지만 뽀삐 1세와 비교하면 얘는 정말 딱 개다.
인과 관계의 이해 능력이나 복잡한 명령은 거의 불가능이다.
뽀삐 1세는 잘못했을 때 '벌 서'라는 단어에 복종했고 나가기 전에 '쉬하고 와' 하면 아무리 마렵지 않아도 화장실에 가서 한방울이라도 짜냈다. 잘못 -> 벌, 산책 -> 화장실에 미리 가야한다. 가 얘의 머릿속엔 설정이 되어 있었던 것. 그러나 뽀삐 2세는.... 주의산만에 천방지축. -_-;;;
그래도 삐져도 1분이니 그건 좋다. 뽀삐 1세는 삐지면 반나절에서 하루. 특히 자기가 잘못하지 않은 사안으로 혼냈을 경우는 이쪽에서 빌어서 풀어줘야했다. 머리 나쁜 개가 키우긴 편하긴 하다. 순하기도 하고. ^^
옆으로 너무 오래 샜는데... 책 자체도 재밌지만 개나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자신의 동물과 이론을 대입해서 보는 재미가 더 크다.
아주아주 즐거운 독서였음~
책/과학
인간은 어떻게 개와 친구가 되었는가
콘라드 로렌츠 | 간디서원 | 2006.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