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나왔다.
2년 전인지 3년 전인지... 대사 각하의 요리사, 스바루, 두 다 댄싱 등등 만화 얘기를 한참 하다가 아직도 이걸 보지 않았냐는 구박을 받고 뒤늦게 찾은 책. 일본 만화라 9권까지 나온 것을 보고도 좀 불안했는데 역시나이다.
9권까지 앞으로 풀어갈 얘기들의 서막이 겨우 정리되는 느낌. 10권은 이제 중반을 향한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다리와 같은 부분인 것 같다.
천재 모짜르트와 범인 살리에르의 얘기부터 시작해서 많은 픽션에선 천재와 범인의 대결(?) 혹은 천재의 일대기(?)를 매력적인 주제로 활용해왔다.
이 만화는 천재를 우러러보는 내용이 되겠지만 그래도 독주보다는 어느 정도의 대결 구도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솔직히 더 재미있다. 초반에 등장했고 앞으로 큰 역할을 할 슈우메이가 있음으로 천재 카이와 일종의 대결 구도로 가지 않을까... 그리고 어릴 때 카이와 콩쿨에서 만났던 소녀의 존재 가볍지는 않을 느낌.
어떤 분야에 대한 거의 전문가 수준에 가까운 지식을 바탕으로 스케일 크게 얘기를 조근조근 풀어나가는 일본 만화가들의 진행 방식은 늘 감탄을 금치 못한다. 상상력은 풍부하게 발휘하지만 산속에 들어가서 피아노 연습하는 소림사의 현대판 같은 황당함은 피하는 그 절묘한 줄타기.--> 이건 글을 쓰는 입장에서 정말로 배우고 싶은 테크닉. 물론 여기에는 심의니 검열이니 하는 소재의 제한없이 무한대로 상상력을 펼칠 수 있었던 인프라 덕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전문 지식이 주인공이 되고 인물이 주변인이 되는 주객전도의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재밌긴 하다.) 피아노의 숲은 피아노와 클래식은 주인공 카이를 꾸며주는 화려한 후광과 액세서리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 바닥을 너무나 잘 아는 인간의 냉소마저도 날려버리는... 괜히 있을 것 같은 상황과 주인공의 매력이 조금은 가벼운 그림과 잘 맞아떨어진다. 청년으로 성장하는 카이의 피아노가 세상에 어떻게 인정받을지에 대한 기대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난 카이에게는 열광을 할지 몰라도 슈우헤이와 카이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 소녀 피아니스트에게 더 감정 이입. 걔네들이 느끼는 그 절망감과 동경을 내가 너무나 절실히 경험을 했기 때문에 아마도 더 그렇다.
초등학교 동창놈이 하나 있다. 지금은 결혼해서 일산에 살기 때문에 거의 전혀 연락을 안하는 친구. 대학에 갈 때까지 난 모짜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에르의 심정을 아주 절절히 느꼈다.
이 친구의 음악교육은 초등학교 때 누구나 받는 피아노 학원이 끝이다. 그런데... 독학으로 쇼팽, 베토벤 등등을 다 쳐내는 것은 물론... 현대음악 곡들의 초견 역시 십수년간 훈련한 우리보다 훨씬 나았다. 그것은 얘를 너무 아깝게 여겼던 내 선생님도 인정. 반주를 시켰을 때(우정을 이용해 고등학교 때 내 반주자로 많이 써먹었음. ^^V) 음악성 감수성과 감각, 테크닉은 대학 졸업한 전문 피아니스트보다 낫다고... 꼭 피아노를 계속 하라고 사정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절대 음감. 풀 오케스트라 연주 청음이 가능하던 얘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난 완전한 절대 음감이 아니기 때문에 내 다성 청음은 모든 경우의 수를 반복해 듣고 그 코드의 음가를 외워서 얻은 후천적인 능력이다. 그나마도 지금은 다 날아가서 다성 청음은 되지도 않는다. ㅠ.ㅠ 그런데 얘는 성당에서 연말에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하기로 하자 판을 구해 듣고 성악부터 모든 파트 악보를 그려왔을 정도. -_-;;; 그리고 우리집 피아노가 조율을 제 때 안해서 1/4도 정도 낮아진 것을 지적하는 괴물... ㅠ.ㅠ
그때 필요도 없는 인간에게 저런 능력을 준 하느님을 무지하게 원망했다. 난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간신히 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인간을 옆에서 본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그건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취미생활로 음악을 고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즐기며 (-_-a) 공부도 상당히 하여 서강대를 갔고 지금은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은행원으로 건실하게 살고 있다. 이게 카이가 될 수도 있었을 내가 알던 한 천재 아니면 최소한 수재의 말로(?).....
일본의 시스템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알고 있다. 피아노의 숲에 나오는 카이는 결국 존재는 하더라도 성장할 수는 없는 천재지만 만화 속 세상에서는 그가 저렇게 멋있게 세상을 향해 나가고 있다.
아마... 내가 만났던 유二한 천재 중 한명인 그 친구를 놓고 혼자 나름대로 꿈꿨던 공상의 나래가 피아노의 숲에선 다른 모습이지만 구현이 되고 있다고 봐야겠지. 기존의 음악계 구조 안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피아니스트가 되겠지? 그런 환타지를 즐기려고 난 이 만화를 보나보다.
내가 10대 때라면 분명 카이에게 나를 감정이입하면서 흥분했겠지만... 아무리 해도 카이와 동질화가 되지 않고 슈우헤이나 그 이름 잊어버린 소녀 피아니스트의 시각이 되는 것은 대략 OTL .
어른이 되는 건 때때로 서글프다. 너무 주제 파악을 잘 하게 됨. ㅠ.ㅠ 상상의 세계에서는 카이가 되봐도 좋잖아....
책/만화
피아노의 숲
이시키 마코토 (지은이), 유은영 (옮긴이) | 삼양출판사(만화)